낡은 소파는 가루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잦은 마찰이 있던 부분의 재질이 자꾸 벗겨졌기 때문이다.버릴까 고민하다가 소파 커버를 씌워 조금 더 연명시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비염이 있는 남편과 첫째에게 커버의 먼지들은 해로웠다.더구나 커버와의 마찰 때문에 소파 표면은 계속해서 벗겨져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이제 곧 둘째가 기어 다닐 것을 생각하니 결국 처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폐기물 스티커를 사 와 붙여 남편과 함께 수거장으로 옮겼다.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넓어진 거실을 보며 남편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끝났다고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자 잘못이었다. 어린이집 하원 후 집에 온 첫째가 소파가 없는 것을 보고 놀라더니 버렸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을 시작한 것이다.
소파 보고 싶어, 인사도 못했는데
아이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계속 울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남편과 나 역시 당황스러웠다. 결국 남편은 폐기물 수거장으로 딸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덩그러니 놓인 소파를 보고 달려가 앉아 다시 울기 시작했단다. 여느 때처럼 누워도 보고 앉아도 보고 한참 시간을 보내더니 손을 흔들고 작별을 고했다고 했다.
그날 밤 육퇴 후 남편과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딸아이를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었던가에 대한 반성이었다.집안의 물건을 '어른'인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탓이다. 아니, 그렇다는 인식조차도 없이 당연한 듯 그냥 처리해버린 일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파는 우리보다는 딸이 더 많이 사용하던 가구인데... 첫째는 9개월 때 소파를 잡고 처음 게걸음을 걸었고, 소파에 수없이 오르락 거리며 미끄럼을 타고 점프를 뛰었다. 3살 무렵엔 TV에 집중한 나머지 소파에 앉은 채로 소변을 보았고 아침잠이 덜 깬 날이면 으레 소파에서 한참이나 뒹굴거렸으니 소파가 무던히도 우리 딸을 잘 받아주었던 셈이다.
우리에겐 그냥 앉는 곳이었지만 딸에게는 놀이터이자 쉼터였고 성장의 기록이었다. 딸아이의 앨범을 보면갓난아기가 5살이 되는세월 동안 가장 많이 사진에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소파였다. 해마다 쑥쑥 자라난 아이의 배경에는 늘 똑같은 소파가 함께 했다.
남편과 나는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의사 결정권을 가진 가족 구성원으로 대우해주지 않은 것도, 여린 마음에 상처를 준 것도 모두 우리 잘못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실내 미끄럼틀을 중고로 구입해 거실에 두고 소파가 없으니 미끄럼틀도 놓을 수 있다고 과장하여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한동안 딸아이는 바닥 생활이 불편해서인지, 그리워서인지 소파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지난여름, 새 차를 구매하게 되어 타던 차를 중고로 팔게 되었다. 새 차가 더 크고 편안해서 아이도 신나 할 거라 생각했다. 아이에게 비밀로 하고 "짜잔~" 하고 공개했을 때 딸아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있다가 입을 떼었다. "우리 하얀 차는?" "그건 이제 다른 사람한테 팔아야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남편과 나는 작년 여름의 소파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중고차 매매업자가 차를 가져갈 때 남편에게 딸아이를 대동하게 했다. 아이는 울면서 뒷 좌석에 누워도 보고 앞 두 자리에 각각 앉아보기도 하고 차를 쓰다듬기도 하더라고 남편이 전했다. 차를 가지러 온 사람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며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딸을 만류해 차와 작별을 고했고 매매업자가 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떠나는 차 뒤로 딸아이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단다.
잘 가,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해야 해!
남편은 덩달아 마음이 울컥했다고 했다. 전해 듣는 나 역시도 아이의 마음과 표정을 상상하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아이도 가족 구성원으로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이의 감정도 언제나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아이에게서 또 배운다.
소파 때와 달리 작별 의식을 가진 딸아이는 금세 새 차에 적응했다. 가끔 차창 밖으로 옛날 차와 같은 모델이 지나갈 때면 "우리 차도 누군가 저렇게 타고 있겠지?"라고 감상에 젖은 듯 말할 때만 빼면.
사실, 나도 울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 그동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무려 '일시불'로 구매한 나의 첫 차였다. 애정과 추억이 듬뿍 담긴 차를 떠나보내며 내 마음도 허전해서 눈물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나야말로 내 정든 차와 작별 의식을 하지 못했다.
역시 사람이든 물건이든 정든 것과의 작별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어른이든 아이이든 마찬가지라는 것도 이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