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인 나도 모르겠다
어째서 유독 한국에서만 어린 학생에게 연필사용을 (반강제로) 권하던 역사가 있었을까.
통념1. 손가락의 소근육 발달 때문이다.
연필이나 샤프나 둘 다 길쭉한 막대기 아닌가. 차이가 있다면 나무냐 플라스틱이냐 하는 재질 정도. 이게 소근육 발달에 영향을 줄 정도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일단 내가 아는 선에서 '연필이 샤프보다 운동기능 발달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만든다'는 연구는 없다. 상식적으로도 손가락 주변의 소근육이 발달하는 데는 필기구의 재질보다는 필기 습관이나 자세, 사용 시간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통념2. 샤프펜슬은 심이 뾰족해서 위험하다.
연필을 안전 상의 문제로 권한다는 것인데 그럼 샤프에 굵은 심을 쓰면 될 일이다. 한편, 연필도 깎아놓으면 거의 흉기 수준으로 날카롭다. 연필을 쓰는 이상 연필깎이를 쓰게 되는데 기계 내부의 톱날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다칠 위험도 있다.(항상 느끼는 건데 아이들의 위험감수 성향과 호기심은 상상 이상이다.) 연필이라고 하여 특별히 안전한 것은 아니다.
통념3. 나무연필이 글씨연습에 도움이 된다.
이 또한 오랜 기간의 임상적인(?) 관찰을 통해 얻어진 '그렇다 카더라'는 주장 외에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외국에서는 수업시간에 샤프펜슬이나 펜 같은 필기구들 잘만 쓴다. 나무연필을 쓰면 길이가 짧아지고 심의 균형도 계속 바뀌는데 글씨가 예쁘게 써질까? 걸핏하면 심이 부러지기도 일쑤다. 내가 관찰하기로는 샤프펜슬을 허용했을 때 오히려 학생들이 글쓰기를 좀 더 즐거워하며 '예쁜 글쓰기 연습'을 많이 하는 경향을 보였다. 샤프펜슬 사용이 글씨연습의 트리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연필을 왜 쓰는데?
내 생각에 초등학생이 연필을 쓰는 이유는 적어도 아동의 발달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것이다.
교육적인 이유보다는 우리나라의 경제상황과 밀접할 거라고 추측한다.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 경공업의 수준과 제조단가를 고려했을 때 아무래도 다른 필기구보단 연필이 초등학생에게 적합했을 것이다. 싸게 대량으로 만들어서 보급하기에는 연필만한 게 없었을 테니까. 선배 세대의 경험담에 따르면 옛날엔 우리나라가 연필 하나도 변변히 못 만들어서, 꾹꾹 눌러써도 잘 써지지도 않고 종이를 찢어먹기 일쑤였다지 않나. 아니면 조금만 힘을 줘도 심이 부러져버렸다든가.
시대가 이랬으면 샤프펜슬이란 물건은 머리에 피 좀 마르고 돈 깨나 모이면 사는 필기구였을 것이다. 그 시절 초등학생이 샤프를 쓰면 '어딜 쪼끄만한 게'라며 한소릴 들었을 테고. 그래도 아이들이 연필 말고 다른 필기구를 쓰고 싶다는 욕망을 꺾기는 참 어려웠을 텐데, 그래서 어른들이 생각해 낸 변명이 저것 아니었을까. 아이들의 투정에 "연필쓰기가 글씨에 도움이 된다"를 갖다붙이던 것이 오늘까지 이어진 통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