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날

너에게

by 나무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들은 그 말에 만족한 듯 보였다. 경찰들도 참, 그들은 모두 젊다.'

-메리 루플, 나의 사유 재산, 작은 골프 연필 중에서 발췌


나는 이 문장의 어디쯤일까 생각해 봤어. '마침내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사이에 서 있음을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세계에 나아가지 못해. 아니 나가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지. 더 이상 나는 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나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선 나는 이해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나에게 요청하고 있어.

너희는 이 문장의 어디쯤 있을까? '그들은 모두 젊다' 이건 어색하고, '그 말에 만족한 듯' 이쯤에 서 있을까? 아니면, '세계는 이해하지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행평가에서 1점이 깎였다고 짝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며 짝의 점수도 깎아야 한다는 너에게. 빈칸을 틀린 내용으로 채워 1점 감점했다고 어쨌든 내용 채운 거라며 항의하며, 채점의 기준이 정확하냐고 묻는 너에게. 1점 감점이 1등급을 놓치는 이유라면 따지는 너에게. 그 1점으로 학교에 민원을 넣은 당신에게. 학부모의 민원을 받아서 분노해 해당 교사에게 사정을 묻지 않고, 불시에 교과 선생들을 불러놓고 공개적으로 인격 모독한 당신께. 지필에서 점수 변별하라고 수행에서 변별할 생각하지 말라며, 누가 정성평가하라고 했냐고 소리 지른 당신께. 들리지 않을 이야기를 하고자 해.


귀 밑 삼 센티 짧은 단발머리 무릎 밑을 덮는 교복 치마 검은색 단화를 신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어. 학교의 규율에 따라 흔히 범생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은 똑같은 외양으로 서있는 개성이라고 찾아볼 수가 없었지. 너도 그리고 나도. 블라우스 위 리본이 풀어진 걸 발견한 나는 서슴없이 묶어줬어. 우리 사이가 가까워진 어느 날 너는 불쑥 다가선 내가 놀랐다고, 마음이 갔다고 말했지. 짐작해 보자면 매일 말없이 쉬는 시간도 점심시간도 청소시간도 공부하는 너에게 아무도 다가가지도 않았고, 다가오는 것도 꺼린 너의 세계에 촉감과 시각으로 그리고 따스한 눈길로 다가간 다른 세계를 느꼈겠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어린 나이에 커피와 콜라를 마셔가며 잠을 자지 않으며 공부하는 너를 바라봤어. 자기는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제일 싫다고 한밤중에 그 소리를 듣고 온 엄마가 불 끄고 자라고 잔소리한다는 너였지. 점심을 같이 먹자고 얘기하는 친구들에게 영어 단어 외운다고 거절한 너였지. 그런 너와 나는 짧은 시간을 함께 했고, 1학년이 끝나는 시기에 전학을 갔어. 그리고 2학년 중간고사 끝나고 너는 다시 돌아왔어. 나와 달리 흰 얼굴색을 띤 너는 그 색을 뛰어넘을 만큼 창백했어. 내 기억 속 너는 이제 무채색으로 남았어. 잠 올까 봐 많이 먹지도 않았던 더 마른 모습으로 서 있었어. 손목과 팔뚝의 두께가 별반 차이 없었지. 그런 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지. 공부만 한다고 애들이 괴롭혔다고. 날 닌자거북이라고 놀렸다고. 나는 거기서 바보 천치며 멍청이로 불렸다고. 너는 더 이상 예전의 네가 아니었어.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의 세계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어. 그렇게 너는 버티지 못하고 자퇴를 했어. 그리고 검정고시로 우리보다 중학교를 먼저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기다렸지. 그때쯤 우리는 사이가 틀어져 연락하지 않았어. 고등학생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너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라졌어. 그리고 나는 나를 증오했지. 세상이 너무 무섭고 싫었어. 치자꽃 향기를 맡게 해 준 너를 생각하면 나는 네가 살지 않는 세상에서 너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학교가 너무 싫었어. 공교육이 싫다고 욕했어. 다시는 학교에 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어쩌다 보니 네가 가고자 한 국문과는 내가 갔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어. 나는 학교에서 너와 비슷한 애들을 봐. 비슷하다고 해서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그 애들은 너처럼 착하진 않아. 세상을 좁게 만들어 살고 있는 애들이야. 그래서 나는 애들에게 성적만 생각하지 말라고 얘기하지. 학교에서 나는 너처럼 멍청이 바보 천치며 닌자거북이와 같아. 너는 그 말이 힘들었지만, 난 힘들지 않았어.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 네가 힘들 때 도와주지 못한 내가, 말해주고 싶었어. 힘들어도 좌절해도, 잘 견뎌달라고. 너희가 사는 세상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길 바란다고. 너에게 못한 얘기를 말했지. 그런데 말이야. 이제 나는 알겠는데 세상을 모르겠어. 나의 힘은 미약하나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 작은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어. 너무 이상적이라고 나무라지는 마. 이건 너의 영향도 있으니깐. 있지. 세상이 그때보다 더 힘들어졌어. 나는 나를 알겠는데, 세상을 모르겠어. 다시 학교가 가기 싫어졌어.


"지금까지 채점한 건 무효입니다."

관리자가 소리 지르듯 외쳤지.


나는 교실에 가서 점수는 무효했어. 그래서 너는 좋아했지. 너희가 보는 세계는 1점이었고 그 세계에서 1점은 중요했지. 너희는 자신을 알지 못해.

내 마음은 무효가 아니야. 마음속에 계속 물음표가 남아. 이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날 너를 생각해. 그리고 사소한 나의 마음을 들여다봤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이건 인격 모독이라고. 이걸 어린 네가 견뎠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할 수 없는 것들만 떠올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절처럼 흔들리지 않은 날이 있을까. 무수히 흔들리는 날이면 벼가 바람결에 눕는 것처럼 눕지 못하고 대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바람을 맞았어. 시퍼런 파도 소리를 내며 서 있어. 나는 너를 생각해. 그리고 너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해. 무너질 것 같아도 사람이 무너지지 않는 것 무엇 때문인가 생각해 봤어. 그건 내가 풀린 리본을 묶어주던 사소함이었어. 사람들은 그 사소함이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는 걸 알까. 그걸 알았다면, 너,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 이름처럼 별이 된 너에게. 나는 우리의 사소함을 기억하며 하루를 마무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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