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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May 13. 2016

"아버지와 나" (2)

해철이 형을 기억하며. 

"아주 오래 전"

<아버지와 나>는 피아노 독주에 나레이션을 입힌 곡이다. 지포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부치고, 지지직 소리가 나고, 그 뒤 깊은 한숨이 울려퍼지다가, 가장 먼저 나오는 대사는 바로 "아주 오래 전"이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모든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그렇듯, "아버지와 나" 역시 아버지의 강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의 서사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항상 강하고 완벽한 존재이다. 굳이 정신분석학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강함에 대해 복합적 감정을 느낀다. 강함은 존경이나 복종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질투와 경쟁의 원천이기도 하다. 아들은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다. 다른 해석을 다 떠나서 피아노 반주에 "아주 오래 전,"이라고 내뱉는 해철이형의 굵직한 저음이 일품이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의외로 이 노래는 어린 시절에 대해서 별로 반추하지 않는다. 그저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강한 존재'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는 아버지와 맞지 않았던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여러 번 그는 가족사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엄마는 여장부 스타일인데다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가부장적 아버지 그 자체였다고 한다. 아마도 술 자주 마시고, 아마도 가끔 꼬장부리고, 아마도 가끔 아이들 엉덩이도 때리고, 아마도 애들에게 큰소리도 제법 치는 그런 평범한 당시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도대체 뭐가 사춘기 신해철, 혹은 서정적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나레이터와 달랐던 것일까? 

강해져라, 아들아!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모든 아버지는, 아니 내 세대 대부분의 아버지는 아들이 강해지기를 원했다. 깽값을 물어주어도 좋으니 맞고 오지 말고 때리고 와라. 우리 아버지 세대만 해도, "약한 자를 괴롭히는 자에게 너의 힘을 사용하라"고 말하기보다 "나쁜 놈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는 논리가 횡행했다. 물론 통계데이터는 없다. 다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싸나이는 울면 안 된다"는 담론이 떠돌던 시기있다. 


신해철의 아버지가 신해철에게 '강해지라'고 이야기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지금보다는 당시의 아버지들은 그래도 아들에게 '강해지라'고 할만큼의 낭만은 남아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강해지라'고 말하기도 두려울 것이다. "꿈을 가지라"는 말조차 쉽게 던지지 못하는 세대이다. 역사상 최초로 유년시절보다 청장년 시절이 더 불행할 수도 있는 시절을 겪는 사람들에게 "강해지라"는 주문조차 하기 어렵다. 그런데 신해철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었던 것일까? 금방 나오듯, 그가 원하는 것은 '자유'의 이미지이다. 조금 진부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다음의 가사를 음미해보자. 

난, 창공을 나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 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창공을 나는 새'라는 비유만큼 진부한 것이 또 있을까? 새를 통해서 상징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지는 너무 싱겁게 드러난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의 논리로 이야기하자면, 아버지는 그에게 '철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지만,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철인'이기를 원하는 아버지와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토마스만의 <토니어 크뢰거> 이후에 소설가들이나 문학도들, 소위 예술가들이 지속적으로 다뤄온 이야기이다. 


짐작건대, 그의 아버지가 대한민국 평균의 보수적 아버지였다면, 그가 음악하는 것을 아버지가 달가워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그는 소위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 출신이 아닌었던가. <그대에게>로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을 지언정, 그것으로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위 "가오"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먹고 살고, 말고는 둘째 문제고, 아버지는 평균적인 엘리트의 삶을 신해철에게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이라면 아무리 잘나도 딴따라 취급을 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연예인에게서 지성을 요구하던 트렌드는 90년대 이후 독특한 트랙이었다. 윤상, 신해철 등 대학생 같은 오빠들이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것. 


아무튼, 신해철은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고자 했다. 이것도 이쁜 말이기는 하지만,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이 말이 주는 감성적 효과 만큼은 뛰어나다. 이 대사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날개달린 무엇이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아버지와 나>의 1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아버지는 강했고, 나는 자유로웠으며,그가 '내가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시점을 바꿔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래이션이 전개된다. 


끝.. 다음 시간에


https://www.youtube.com/watch?v=KcTmbjGXA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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