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이야기(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He's not just int
연락처를 준 남자들이 자신에게 전화하기를 기다리는 '지지'(Gigi)에게 바텐더 알렉스(Alex)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전화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전화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당신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연애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인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 알 것인가'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마음을 말이라는 텍스트(text)로 바꿔서 상대에게 들려주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모두 다 "나는 너에게 맘이 있어."(I have a thing for you, I have a crush on you)라고 고백한다면, 소위 말하는 연애의 밀당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연애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내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김창현의 연애백서에는 <연애의 4대 경우>라는 문제의식이 등장한다.
1. 무관심: 내가 상대를 안 좋아하고, 상대도 나를 안 좋아한다(대부분의 경우).
2. 짝사랑: 내가 상대를 좋아하고, 상대는 나를 안 좋아한다(역시 대부분의 경우).
3. 피 짝사랑: 나는 상대를 안 좋아하고, 상대는 나를 좋아한다.
4. 연애 가능: 내가 상대를 좋아하고, 상대도 나를 좋아한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4번(나->상대, 상대->나)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4번의 경우에도 내가 상대에게 고백하지 않거나, 상대가 나에게 고백하지 않으면 연애는 성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고백"까지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가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된다.
<만남>-<호감>-<번호 따기>-<전화>-<약속>-<데이트>-... <이 데이트를 계속하시겠습니까?>
1) 계속한다(연애)
2) 그만둔다(작업 실패)
첫 만남 때 데이트까지 바로 연결되는 경우는 없으며, 만남 이후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단계는 <번호 따기>와 <전화>이다. 그런데 여기서 <번호 따기>만 하고 <전화>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 모든 관계(relationship)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참고: 로코물에서 relationship은 거의 '연애'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딜레마가 성립된다. 만약 상대가 나에게 번호를 땄는데 전화를 주지 않는다면?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이 일은 거의 매일 일어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명함을 500장을 넘게 뿌린 것 같은데 정작 나에게 전화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다시 이와 같은 문제는 꼭 '연애'(love life)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관계(relationship)이라는 문제로도 확대시킬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연애에 집중해서 가기로 한다.)
상대방이 전화하지 않는다면?
1. 무관심: 잘 됐다.
2. 짝사랑: 혹시나 나에게 전화를 주지 않을까 하고 기다린다.
3. 피 짝사랑: 잘 됐다.
4. 연애 가능: 혹시나 나에게 전화를 주지 않을까 하고 기다린다.
2번과 4번의 경우에 지지(Gigi)는 상당히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정작 일어난 일은 2번인데(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음) 지지는 4번(연애 가능)이라고 종종 착각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어본다.
4번(상대가 나를 좋아하고, 나도 상대를 좋아함)인데 상대가 지금 너무 바빠서 전화를 손에 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해외로 가서 전화를 하지 못하지 않을까? 내 전화번호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지지는 말하자면, 대부분의 상황이 2번(짝사랑) 임에도 불구하고 4번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어리석게(silly) 보이기도 한다.
알렉스는 "남자가 전화하지 않는다는 건 당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못을 박아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나중에 지지를 사랑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남자는 수많은 이유로 여자에게 전화하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부끄러워서" 혹은 "무서워서"이다. 소셜미디어 문화가 발달한 이후로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이제 남자들은 전화 대신 메시지(text)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여자들은 남자들의 마음을 알아내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전화해서 '나는 당신에게 마음이 있다'라고 고백하는 것보다는 카톡으로 '너에게 마음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100배는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문자가 항상 '진심'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심지어 고백을 할 때조차 이런 의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거, 진짜야, 가짜야?
이 세상에는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도, 혹은 상대에게 관심이 크지 않아도, 혹은 다른 목적으로 사람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때 상대가 주는 신호(signal)를 연애 신호로 착각하여 덤벼들 경우 자신만 손해를 보게 된다.
4번일 경우 조차, 그것이 상대방의 진심일 경우에만 유효하다.
사실 지지는 상대방의 신호를 잘못 읽는 얼간이인 것 같고, 알렉스는 똑똑한 척하면서 지지에게 "그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알려주지만 사실은 반대이다.
지지는 어눌해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갈구한다. 알렉스는 똑똑해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을 주지 않고(주지 못하고), 상대에게 진지하게 대시하지 않는다.
사실은 지지는 2번과 4번이 헷갈리는 상황을 계속 만들고,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이 모든 행위는 진심을 담은 4번 상대를 찾기 위해서 필연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와 같은 리스크(혼자 고백했다가 차이는 상황)를 두려워한 나머지 더 이상의 행동(action)을 취하지 않는다. 될 것 같은 연애가 꼭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스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로맨스 영화답게, 로맨스란 '로망'을 담은 영화이므로, 결국 알렉스와 지지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보인 줄 알았던 지지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 용감한 여성이고, 똑똑한 척하는 알렉스는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는 얼간이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문제의식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마녀사냥>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는 매우 자주 다뤄졌다. 예를 들면,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하는 식의 고민이다.
마녀사냥에서도 "전화만 하고 사귀자고 하지 않는 남자, 나를 좋아하는 것 맞나요?"라는 사연이 종종 올라온다. 여기에서 신동엽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신동엽의 정리).
신동엽의 정리: 남자란 동물은 절대 관심 없는 여성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만나지도 않는다.
이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관심이 없고, 혹은 꼭 이성적으로 가 아니더라도 호감이 없는, 사람에게 정말 친절해서 연락을 주고받는 남자(여성도..)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의 문제의식은 모두 해결된 것인가? 전화를 하고 만났다는 것은 모두 호감인가? 정말 대시해도 되는 걸까? 그런데 상대가 2명 3명에게 똑같이 행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변수가 있다. 혹은 상대가 당신에게 연애감정을 이용해서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위험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문제 중 하나이다.
지지의 정말 위대한 점을 이와 같은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점이다. 상처가 두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 나서고, 또 고민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용감한 사람들은 '사랑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로 '사랑을 하게 된다', 고로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로 '행복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를 꼭 '성적 매력'이 주된 자본인 연애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 작가는 독자를 사로잡아야 하고, 독자는 자신에게 맞는 작가를 찾아야 하고,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줄 제작자를 찾아야 하고, 구직자는 자신을 채용해줄 회사를 찾아야 한다. 모두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가능한 일이다. 연애를 하려면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야 하듯이, 성공을 하려면 자신을 도와주는 조력자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꼭 우리가 성공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둘러싼 '관계'는 삶을 좀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 준다. 성공이 없는 삶은 그럭저럭 견딜 만 하지만, 관계가 없는 삶은 절망적이다.
이 정도면 우리도 새로운 '관계'를 찾아서 나설 용기를 가지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꼭 4번이 아니라면 어떠한가? 더 많은 2번을 만날수록, 4번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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