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쓸데 없이 찾아온 일본에 대한 생각들
최근 몇 년만 가장 긴 휴가를 내고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넷플릭스로 미뤄 놓은 영화를 보았다. 항상 그랬듯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다. <추가 완료>
1. 오사카, 교토, 일본, 일본어
오사카는 일본 제 2의 도시이다. 사실 인구는 요코하마가 더 많지만, 역사, 상징성 등 여러 이유로 사람들이 제 2의 도시라고 부른다. 인구는 270만명 수준. 주변에 교토, 고배, 나라 등 일본 역사를 배우면 꼭 나오는 지명들이 있다.
교토는 독음으로 '경도'라고 읽는 사람도 있다지만, '수도'라는 뜻이며 고유명사로 굳어진 케이스이다. 중국의 '서울'은 베이징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교토는 그 자체로 '수도'라는 뜻도 되고, '교토'라는 도시를 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수도는 교토가 아니라 도쿄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그토록 차지하려고 기를 쓰던 지역은 도쿄가 아니라 교토이다. 그만큼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지역이며, 세계 제2차대전 공습 때도 교토만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공습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서 한국인은 복잡한 감정을 가진다. 오사카성의 장엄한 규모, 그리고 그 안을 수놓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여러 글과 그림들은 한국인을 불편하게 한다. 멀쩡하게 있던 조선을 침공해서(이 정도 규모의 군사가 다시 동원된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고 한다)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그런 역사를 가졌을 때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일기에 자신의 과오를 적고 그것을 남에게 공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튼 오사카성에서는 참 여러 감정이 들었다.
잠이 안 올 땐, 호텔에서 히라가나를 외웠다. 이걸 이제서야 외우냐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이번 일본 여행을 통해서 외우게 되었다(가타카나는 아직...). 딸 아이는 이미 일본 방문에 들떠서 가타가나와 히라가나를 다 외웠단다.
나는 한자를 잘 아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예전에 자격증 한 번 땄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웬만한 한자는 한국어 독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사카성으로 진입하는 다리 중 하나가 "극락교(極樂橋) 였는데, 한국어 독음으로는 '고쿠라쿠바시'였다. 극이 '고쿠'가 되고 락이 '라쿠', 교가 '바시'가 되어서 고쿠라쿠바시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오사카 신세계(新世界)는 '신세카이'라고 불렀다. 이런 식으로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니, 일본어 읽어보고 싶다. 나아가서 일본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금방 들었다.
2. 사무라이의 시대
왠지 넷플릭스에 일본 역사를 다룬 다큐가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니 진짜 걸작 중 걸작이 있었다. '사무라이의 시대' 6부작을 보고 나니 센코쿠 시대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성장과 죽음, 임진왜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국 통일까지의 과정을 역사학자들의 설명과 배우들의 상황극을 곁들여 볼 수 있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역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130년 내전에서 태어나서 죽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불행할 것 같다. '조총'의 위력을 앞세워 최고의 다이묘로 등극하던 오다 노부나가 역시 평생을 살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시달리다, 편집증적 증세를 일으켰다. 교토를 정복한답시고 엔랴쿠지(延曆寺, 일본의 유명한 사찰)를 불태우고 어린아이와 여성들까지 모두 죽였으니 자기도 언제 그렇게 될 지 무서웠을 것이다. 실제로 엔랴쿠지를 태우면서 수많은 불교신도들이 그에게 분노했고, 나중에 그는 그렇게 반란을 일으킨 아케치 마쓰히데(明智秀満)에 반격을 당한다(오다 노부나가는 맹렬하게 싸우다가 자결하는데, 시신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생존설이 모락모락...).
일본 사람들을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임진왜란에 파견된 수많은 병사들 역시 사실 뒷일을 모른 채 그냥 타지에서 대책도 없이 싸우는 동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인드는 정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때마친 어렵게 얻은 첫째 아들이 1891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콤플렉스가 있기 마련인데, 그가 천민 집안에서 일본을 통일하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역설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이 업적을 물려받지 않으면 자신의 업적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첫째를 잃은 슬픔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신적으로 아주 불안했고, 사자들 역시 전쟁에서 좋은 소식만 있다고 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술에 정말 능한 장군이었으나 임진왜란에 있어서 만큼은 '진군하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결국 일본을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역사학자들은 도쿠가와야 말로 일본을 제대로 통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30년동안의 내전이 드디어 '정말로' 끝난 것이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살려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의 한수가 되었다. 히데요시의 잔당이 히데요리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실패를 하자, 일본은 의심할 여지 없는 통일의 상태가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일본은 사무라이 정신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130년동안 이들은 전쟁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이제서야 '사무라이다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고, 잘 아는 것처럼 17세기 일본은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된다(겐로쿠 문화(元祿文化), 화정기(化政期)의 문화 등).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조총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 먼저 수입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술결정론적 시각이 다분한 나에게 있어서도 이 대답은 그렇게 긍정적이지가 않다. 왜냐하면 일본은 당시 전 세계 둘 도 없는 치열한 내전 중이었다. 조총의 기술이 일본에 상륙한 이래로도 빠르게 개선되고 진전될 만큼 일본 전쟁 사회는 조총을 필요로 했었다. 하지만, 내전이 끝나고 세종 이후 안정을 되찾은 조선사회에서 조총 같은 것이 수입되었다 한들 그것이 요긴하게 쓰였을 리 없다는 생각이다.
하나 더, 임진왜란을 막은 우리 선조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일본 사무라이들은 100년 넘게 전쟁만 해온 전쟁의 귀재들이었다. 지상군으로 만나면 그들은 천하무적이었다. 기마병들은 일본도를 꺼내자마자 사람의 목숨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정도로 길고 무서운 칼과 창을 쓰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일본군을 두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군인이 17만명이 조선으로 유입되었는데, 결국 이순신 등 조선 해군,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추가>
사실 처음 의병을 일으킨 의령의 곽재우, 광주 출생의 김덕령 등 기려야할 인물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일본 군대를 제대로 엿 먹인 것은 이순신 해군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이야 한국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군사전략적인 측면에서 잠깐만 언급하자면, 이순신 장군은 사실 지리 천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태동 선생님의 책에서 '제갈량은 지리학자'였다는 해석을 읽은 적 있다. 이 말을 책에서 읽고 나는 좀 놀랐는데, 지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제주 해녀들이 그냥 잠수를 잘 해서 물질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잘 알아야 한다. 어디에 해산물이 있고, 어디로 가면 급류에 휘말려서 죽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지리를 잘 안다'는 데 있지 않고, '지리를 활용해야 전쟁에서 승산이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 포인트를 짚어서 승전을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일본의 해선은 빠르게 다른 나라까지 진격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배 밑이 뾰족하게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어선은 바닥이 둥글둥글하다. 일본 배는 직선으로 빨리 달릴 수 있지만, 측면 공격에 취약하고, 한국배는 느린 대신에 방향 전환을 쉽게 할 수 있다. 즉, 급류의 위치만 알 수 있다면, 일본군이 빠르게 쫓아오게 만들어 측면 공격을 시도해볼 순 있다. 학모양으로 일본군대를 포위해서 측면을 공격하는 학익진은 성공한다.
일본 내전은 모두 내륙에서 전쟁이었기 때문에, 수군의 전략만큼은 이순신을 따라가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지형지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홈그라운드의 장점 역시 중요했다.
암튼 넷플릭스의 '사무라이의 시대'에는 곽재우만 등장하고 이순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서양 학자들이 임진왜란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거나, 일본에서 이순신 수군의 활약을 자존심 상 잘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누락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도 느꼈지만, 한국의 또 하나의 장점은 겨울이 지독하게 춥다는 점이다. 오사카야 추운 날씨에 적당히 야영 하면서 비벼볼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뜨뜻한 온돌방에서 자지 않는 이상 겨울은 시베리아에 버금가는 추위이다. 이번 설 끝나고 서울 기온이 영하 19도까지 떨어졌다고 하던데, 오사카는 영하 3도 수준이었다. 이렇게 겨울 기온차이가 극심하다 보니, "하면 된다" 수준으로 추위에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처음에야 기세등등했지만, 다이묘들은 1년이 지나자 겨울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다이묘 역시 승산을 보면서 싸우는 약아빠진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자 이 전쟁은 단숨에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서서히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다이묘들은 은근히 본국에서 돌아오라고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는데, 정작 도요토미는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된 보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진군'하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분분하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정리되지 않나 싶다. 첫째는 쌈박질만 일삼아온 다이묘들에게 관성대로 할 일을 준 것이다. 통일이 되어서 더 이상 호전성의 에너지를 쓸 곳이 없다면, 그 칼날의 끝은 결국은 자신을 노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살려고 다이묘들을 출장 보낸 것. 또 하나 이유는 이제 일본이 통일 되었으니, 다이묘들에게 나눠줄 땅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야, 조선 땅 정복하면, "그 땅 너희 관할로 만들어 줄게."라는 아주 달콤한 유혹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무사들은 겉으로는 충성하지만, 철저하게 주고 받는 계약 관계에 있었다. 그런 계약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을 눈치챈 다이묘들은 열심히 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암튼, 우리 선조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친절한 사람들
마지막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4시쯤 된 애매한 시간에 추위를 피하려 아이와 함께 커피숍을 찾았다. 우리나라는 천지가 커피숍인데 일본에서 의외로 커피숍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커피숍이라고 되어 있는 가게는 담배피운 손님들을 받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문을 열어둔 것 같은 가게에 그냥 들어갔다. 안에서 주방장님이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오픈 시간이 아니라 브레이크 타임이었던 것이다. 일본어가 안되니 손짓 발짓으로 이해하고, "괜찮다, 나가 보겠다."는 제스쳐를 취하고 나갔다. 그 때 그 주방장님은 요리를 하다 말고 나와서 '고멘나사이'(미안합니다)를 정중하게 몇 번이나 외쳤다. 심지어 내가 밖으로 나간 후에도 밖에 나와서 "미안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한국에서는 잘못한 사람에게도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 없는데, 이 경우는 그 사람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한편으로 조금은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존중 받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결론: 새해에는 조금 더 친절한 사람이 되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