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관념론적 공간론과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적 공간론
이 글은 "데이비드 하비 가장 쉽게 이해하기"(가제)라는 원고의 일부입니다. 추후 책으로 출간될 내용이니 인용은 하지 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자본의 한계』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뤘어요.
이번 시간에는 『자본의 한계』의 서문을 조금 다뤄볼까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약간은 죄책감이 느껴져요. 사실 하비 교수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냥 그의 책을 읽는 것이에요. 2023년 지금 시점에서 『자본의 한계』는 절판되어서 이제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운 좋으면 중고 서점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정성이 있다면 무료로 pdf가 풀려 있어서 영어로 된 원본을 직접 읽을 수도 있어요.
최병두 교수님의 번역이 훌륭하기로 유명하지만, 원서로 읽어보는 것도 훌륭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built environments라는 표현이 있는데 최병두 교수님 번역본에는 '건조환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비 교수는 s를 붙여서 복수를 썼어요. 하비는 '건조 환경' 일반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교량, 도로, 아파트 등 구체적인 하부구조물들을 떠올리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어요. 이런 차이를 보는 점이 원서를 읽는 맛이죠.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에요.)
이것이 이 책을 쓰고, 또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나 지리학에 대한 선행 지식이 없으면 하비 교수의 글은 너무 어렵거든요. 마르크스만 알고 지리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책을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보았어요. 하비 교수의 히트작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그의 저작 중 가장 쉬운 책으로 유명한데, 그 글조차 쉽지는 않아요. 하비 교수의 엄청난 독서량과 문화적 소양으로 인해서, 수많은 화가, 소설가, 철학자들을 언급하면서 지나가거든요. 그 궤적을 다 이해하면서 지나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물론 저도 다 이해할 수 없어요. 어려운 책을 읽을 때, 제가 가진 방법은 그 사람이 되어 보려고 하는 거에요. 물론 그 책의 모든 구절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면 그 책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하비 교수의 인생 궤적을 구구절절이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번째 문단에서 하비 교수는 곧 바로 『사회정의와 도시』를 언급합니다. 길게 설명하지만, 짧게 말하자면, 마르크스와 도시화 과정을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사회정의와 도시』는 부족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는 ‘빈 상자’를 채워야 했다고 합니다.
『사회정의와 도시』에서 그는 마르크스 저작을 부분적으로 가져와서 도시화 과정에 연결시키려고 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학계의 주목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글에서 잠깐 다뤘듯이 마르크스 이론은 엄청나게 넓고 깊습니다. 심지어 마르크스를 다룬 만화를 보면 그가 온 몸에 털이 정말 많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미학,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등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죠. 회사를 다니시는 분은 대부분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어쩌면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회의 한 요소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마르크스의 영향이기도 해요.
하비 교수가 인정하듯이, 자본주의와 도시화라는 거대한 주제를 놓고 보았을 때, 그 작업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속속 모두 뒤져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어요. 게다가 이미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평생 원고를 쓰고 살았어요. 대학자에게 이렇게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그의 관심사는 정말 깊고, 다양하고, 때로는 산만하고 정리가 되지 않았어요.
그의 방대한 원고를 정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사실 많은 마르크스의 원고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서 편집되어 출간되었어요.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아이디어를 엄청나게 생산해내고, 그것을 엥겔스가 책으로 만들어 주는 격이었죠. 마르크스는 엥겔스가 얼마나 믿음직스러웠는지 자신의 아이디어를 책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기 까지 해요. 그래서 나온 책이 바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입니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국가론, 국제무역, 위기론 등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특히 자본론 3권, 잉여가치학설사, 그리고 요강(그룬트리세, Grundrisse)에 흥미를 가지고 일반이론을 구축했다고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자본론』이 이루지 못한 ‘자본주의와 도시화’라는 일반이론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지요? 어떤 툴로? 마르크스가 사용했던 바로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사용하겠다는 것이지요.
이전 글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역사유물론은 인류 역사의 물적 토대를 분석함으로써 사회를 분석하는 방법입니다. 마르크스가 제안한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하부구조, 즉 경제가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역사입니다. 하부구조가 변하면 그 충격이 누적되다가 상부구조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새로운 체계가 탄생하죠.
이와 같은 변화를 마르크스는 ‘혁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고대 노예제에서 생산량이 증대하자, 노비들을 거두어 먹여살리는 방법이 아니라 계약에 근거한 중세 봉건제로 체제가 변화하게 됩니다. 마르크스 입장에서는 자본주의도 더 생산량이 증대되면 뭔가 폭발이 일어나서 다른 형태의 사회구조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것이 여러분이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던, 메니페스토!, 즉 ‘공산당 선언’의 내용입니다.
저는 하비 교수의 이 언급이 아주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들어보세요. 여기 나온 하비의 문장은 제가 직접 의역했습니다.
나는 선험(a priori)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질문과 표현이 스스로 말하게 할 것이다(Harvey, 1982, 서문 15page)
선험?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닌가요? 바로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우죠. 칸트의 용어에요. 선험적 지식이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관념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즉 시간과 공간 같은 것들이죠. 아 참! 여기서 또 ‘공간’이 나오네요. 나중에 시간에 되면 칸트의 관념론적 공간론이 하비의 공간론과 어떻게 다른지 한번 다루겠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하비 교수의 위 문장은 역사유물론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책의 서술은 다소 과감해요. 예를 들어 “물리적 사회적 하부구조에 대한 투자에는 몇 가지 고려사항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전환시간(turnover time)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긴 시작과 시차(lead and lag, 이끌다가 쳐지는 현상)가 발생할 수 있다”(409)는 식이에요. 뭔가 매뉴얼 같은 느낌 아닌가요? 그러니까 저자의 생각을 쓴다기 보다는 우리가 설정해놓은 조건으로 사고를 하다 보면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식입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자본의 한계』가 ‘역사유물론에 근거한 일반 이론’을 지향하기 때문이에요.
하비 교수는 『사회정의와 도시』에서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자본주의 공간론을 접목하려고 시도했어요.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 이 시도는 완전하지 않았고, 하비 교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거대한 사상 체계 안에서 도시이론을 만듭니다. 다시 한 번 ‘자본의 한계’라는 제목(Limits to Capital)이라는 제목이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하비는 마르크스의 사고와 방법론을 가져와서 그 방법론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와 도시 그리고 나아가서 공황론과 금융이론까지도 일반 이론화하려는 시도를 했던 겁니다.
이와 같은 시도는 과연 성공적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