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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Jul 03. 2020

네, 저는 연구원입니다.

'직장생활' 편 파일럿 글

이 글은 페이스북에서 페친께서 제안해주신 주제로 작성된 글입니다. 업로드 후, 10일 안에 좋아요 20개가 넘고, 공유 10개가 넘으면 연재할 예정입니다. 


0.

저는 오늘도 키보드를 두두두두 두드립니다. 하얀 컴퓨터 모니터 바탕에 까만 글씨가 하나씩 새겨집니다. 단어가 만들어지고, 문장이 만들어집니다. 표가 만들어지고, 숫자가 들어갑니다. 

네, 저는 연구원입니다. 


1.  

어느날, 후배가 전화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오빠 하는 일이 뭐에요?"라고 묻기에 "비밀요원이야."라고 답을 했어요. 하는 일에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지만, 외부에 알려주기 싫은 점도 있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하기가 곤란했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상대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2. 

저는 연구원이에요. 말 그대로, 하루 종일 하는 일은 연구보고서를 쓰는 일이에요. 누군가의 요청을 받아, 자료를 찾고, 분석을 해서, 연구보고서를 쓰는 일이 제가 하는 일이에요. 


3. 

제 일은 어느 기관의 예산집행 가능 여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요. 물론 저는 결정권자가 아니고, 또한 예산을 수립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쓰는 글은 어떤 기관의 예산의 집행 여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주 민감하지요.


저는 소셜미디어에 좀 용감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쓰는 편인데, 제 직무에 대해서는 잘 쓰지 않아요. 좀 민감하거든요. 물론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온라인에서 거의 소통을 안하지만, 약간의 호기심만 있으면 제 글을 찾을 수도 있지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약간은 긴장되네요. 


4. 

주로 저희는 공공기관을 상대해요.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공무원이거나 공기업 연구원, 변호사에요. 원래 저는 지역 사업가, 지역 언론인, 자영업자 등 조금 폭 넓게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이렇게 공공부문 사람들과 집중적으로 일해본 건 처음이에요.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 분들은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젠틀하고 나이스한 매너를 가지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은 그렇죠.


5. 

명함 팔 때마다 고민하는 부분이 있어요.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 정도는 명함에서 알려줄 필요가 있거든요. 현재 제 명함엔 '지리학 박사'라고 되어 있는데, 그냥 "박사"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사회과학 박사"라고 할 수도 없어서 "지리학 박사"라고 해요(참고로, 지리학이 '이과대학'에 소속되어 있는 대학교도 있어요.)

 

제가 일하는 분야가 '지리학'과 상관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명함을 보고 가끔씩 질문하는 분이 있어요. "지리학 하셨네요. 반가워요."라고 하시는 분은 지리학 공부하신 분이고요. 아주 드문 경우고요. 이런 경우도 종종 있어요. 

"지리학 하셨는데, 이 쪽 분야 이야기는 이해가 되실지 잘 모르겠네요."  

보통은 아주 나이스하고 젠틀하게 말씀하셔서, 나쁜 의도가 없으신 것 같아서 더 기분이 묘해요.  


6. 

얼마 전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묻더군요. 

"살면서 가장 짜증나는 사람이 누구에요?" 

보통 같으면 그냥 대답을 안했겠지만, 대답을 안할 수가 없는 자리였어요. 저는 특정인을 지칭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때 어떤 상황이 갑자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어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 되는 걸 해달라는 사람들이요."


7.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인가, 본 적이 있어요. 경찰이 가족보다 먼저 어떤 사람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가족에게 비보를 알려주더군요. 

직장생활이란 것이 그런 것이지요. 누군가는 남에게 모진 말도 해야 하고, 또 가족이 떠났다는 비보도 전해야 하는 법이지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에요. 

제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에요.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그것에 따라서 예산 집행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민감한 일이에요. 보고서 내용을 특정한 방향으로 바꿔달라고 하기도 하지요. 

이럴 때 중요한 건 '선'이에요. 


8. 

Cross the line.  선을 넘다. 

영어 표현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선을 넘어요. 연구원은 난감한 입장이지요. 연구원은 힘이 없거든요.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쓴 글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것이 연구원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글은 칼과 같아서 언젠가 나를 해칠 수 있거든요. 내가 쓴 글이 칼이 되어 돌아와 나의 목을 겨누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모든 글을 쓸 때 이 글로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써요. 

연구보고서는 오죽하겠어요. 객관적 자료와 기준으로 두번 세번 체크하고, 제가 기댈 수 있는 방어막을 확실하고 공고하게 다져놓고 글을 쓰지요. 그렇게 글을 쓰더라도 상대가 내가 쓴 글, 혹은 내가 자료 처리한 표를  "이것은 틀렸다", "옳은 내용으로 바꿔달라"고 할 때가 있어요. 

"실수에서 비롯된 오류"는 재빨리 사과하고 수정합니다. 그건 나 자신에게 창피한 일이고, 또 지적해주신 분들께는 감사하죠. 그러나 꼭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9. 

가끔씩 이런 논의의 분위기는 조금 험악해지곤 합니다. 마지막에 저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어요. 


"연구원의 양심을 걸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렇게 바꿔드릴 수는 없어요." 


10. 

이런 이야기를 하자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졌어요. 

질문하셨던 분은, "그래도 끝까지 바꿔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라고 다시 묻더군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 I a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말론브란도의 유명한 대사가 떠올랐어요. 대부의 경우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강으로 보낸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는데, 물론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없겠죠. 진짜 그렇다고 생각하면 무서울 것 같아요. 

사실 누군가가 나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 아니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일이죠.


11. 

글을 대충 마무리하고 싶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해봐요. 내가 쓴 글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내어 읽는 상상. 오타 하나 쯤은 용서할 수 있겠죠. 그러나 잘못된 사실을 기반으로 한 틀린 결론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내어 읽어야만 한다면, 그렇게 속상한 일도 드물겁니다.  


12.  

저는 오늘도 키보드를 두두두두 두드립니다. 하얀 컴퓨터 모니터 바탕에 까만 글씨가 하나씩 새겨집니다. 단어가 만들어지고, 문장이 만들어집니다. 표가 만들어지고, 숫자가 들어갑니다. 


네, 저는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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