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하늘바라기 Jul 15. 2021

외톨이 나에게 유일했던 친구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다



“내년이면 서울 올림픽이 열립니다”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준비가 한참이였던 시기였다. 학교에서 매일 호돌이 그림을 그리고 오륜기를 색칠하며 보내던 그 시절 대부분의 모든 가정이 그랬듯 아빠와 엄마는 생계를 위해 늘 바쁘셨고, 고학년이었던 오빠는 오후 수업까지 있었던 관계로 학교가 끝나면 집에 혼자 와야 했다. 문을 열면 현관에서부터 전해져 오던 적막함에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싫었던 날들도 많았다. 어느 날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어 우리 언니가 좋아하는 책 전집이네, 빌려줄래?”

“응”


엄마 친구분이 작년에 아이들이 모두 컸다고 짐 정리하시며 주신 책이다. 언제 엄마가 가져오셨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 책들이 그 자리에 꽂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초등 4학년인 나에게 그 전집은 정말 재미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일률적인 빨간색 표지에 금색 제목 그리고 빡빡하게 쓰인 글들 안에서 그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벽돌 같은 묵직한 책의 두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 친구는 책을 빌리기 위해 나와 함께 하교했고 책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비가 주적주적 내리던 어느 날. 어둑어둑해지던 오후 무료했던 나에게 거실 한쪽에 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문학전집 60권이었다.     

‘이게 그렇게 재미있나’





호기심에 ‘소공녀’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난 그 책에 빠져들었다. 그날 이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빨라졌고, 현관에서의 적막함은 사라졌다. 오빠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구술 통을 들고 쫒아다 니기 바빴던 나는 오빠가 언제 들어왔다가 나가는지 관심도 없게 되었다. 한 달의 방학 동안 60권을 모두 읽어 내려갔다. 소공녀, 소공자, 빨간 머리 앤, 허클베리핀 모험, 톰 소여의 모험, 장발장.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을 뽑아 다시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난 그렇게 책과 친구가 되었고 아무도 없는 적막함 속에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더 이상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게 되었다.     


대학 입학 후 교양과목 신청 리스트에서 난 문학 수업을 골랐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수업 리포트도 많고 교수도 깐깐하네’라는 친구들의 말을 뒤로하고 신청했다.

문학 수업 첫날 교수님이 선정하신 책 2권은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핀의 모험이었다. 난 웃음이 났다. 초등시절 내 친구들 아닌가?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 시절 수도 없이 읽었기에 그 친구들의 모험담은 이미 내 머릿속에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이끌고 가시는 교수님은 미국 문학 전공자이셨고 그 수업을 통해 내가 초등시절 읽었던 벽돌 같은 책들이 완벽한 번역판 문학 전집이었다는 것과 재미있게만 읽었던 그 책들은 영국, 미국, 러시아 문학사의 대표적인 작품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수업을 통해 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와 더불어 작품 속 대사 하나하나에 작사의 생각과 숨결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수업 이후로 대학 도서관을 내 집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매일 숨 가쁘게 뛰어다니던 20대의 일상 속에서 잠깐의 시간이 주어지면 어김없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도서관을 찾았던 건 대단한 공부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하루 중 잠깐 주어진 시간을 조용히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 권의 책과 함께 말이다. 소극적이고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친구들과 수다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을 늘 더 즐겼다. 그중 도서관은 조용히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었다. 아르바이트와 또 다른 아르바이트 사이에서 잠깐씩 주어지는 짧은 휴식 같은 시간에 짬짬이 읽는 책은 그 시절 나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였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책을 읽어주던 나는 성경암송을 하며 스스로 한글을 뗀 아이들에게 어린이 세계문학 전집을 빌려다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린이용으로, 그다음은 좀 얇게 편집되어 나온 편집본으로 빌려 열심히 읽어주었다. 재미있다는 반응이 나오자마자 무섭게 원본을 들이밀었다.


엄마가 읽어봤는데, 진짜 재미있어,
이 책이 원본 소공녀야


딸에게는 그 시절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순서대로, 아들에게는 모험 시리즈들을 골라주었다. 세계문학전집을 골라준 것을 마지막으로 아이들 책 읽어주는 것을 졸업했다. 책을 많이 읽어야 머리가 좋아진다. 문해력이 높아진다, 초등 국어실력이 대입을 결정한다 등등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뒤로하고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골라주었던 것은 그 시절 내가 만났던 그 친구들을 소개해 주기 위함이었다. 어릴 적 만나 오랜 시간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소중했던 시간 속의 그 친구들을 내 아이들이 만나길 원했다. 지금도 딸이 다양한 버전의 세계문학전집을 빌려다 읽을 때 엿에서 기웃기웃하는 나를 본다. 내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나에게 좋은 글을 통해 재미와 편안함을 주었던 친구들이었기에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이는 것 같다.     


나에게 글이란 내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타임머신이고, 적막함 속에서 유일하게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소중한 친구다. 그 시간 속에서 나에게 안식과 편안함을 주었던 휴식 같은 친구들에게 이제 조금씩 다시 다가갈 수 있을 거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홍당무 아이 뻔뻔한 척 발표하기까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페이스북·트위터로 가입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