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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Jan 06. 2022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푸른여우의 냠냠서재 / 얼굴 없는 마음의 복잡한 초상화를 그리다

추천 지수는 : ★★★★ (8/10점 : 읽기 난해한 책이지만, 품질은 보장합니다.)

정말로 끔찍하고 잔인한 건 한 인간이나 짐승이 다른 인간이나 짐승을 미완성의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p.40)


난 그저 제로이고 싶습니다. 난 따뜻한 온정도 싫고, 남과 반드시 친해져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고, 주먹질이라는 폭력 이상으로 우정이라는 폭력을 두려워한단 말입니다. (p.68)


다리 위로 돌아와. 한 번만 돌아와 줘, 딱 한 번이면 돼, 내가 널 볼 수 있도록 일 분만 돌아와. (p.112)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에서 손님과 딜러는 '주로 상가들이 문을 닫을 무렵에 이루(p.7)'어지는 딜(deal)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딜러는 계속해서 손님에게 무언가를 제공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손님은 반대로 '당신과 섞이는 위험 따윈 전혀 원하지 않는(p.66)'다면서 딜러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한편, 같은 책에 수록된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에서는 '잠시 동안 머물 방을 찾(p.82)'고 있는 '나'가 '너'를 향해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조용한 비극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새삼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문장들, 읽기 어려운 고전

   수록된 이야기들은 모두 난해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것이 연극으로 상연된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이걸 도대체 어떻게 살릴 생각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에서는 자신의 방을 찾고 있는 주인공 '나'의 독백만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으며,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또한 추상적인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읽기에는 상당히 어렵고,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이 이어지곤 합니다. 중간중간 인상 깊은 구절들이 등장합니다만, 만약 통째로 이 책을 다시 읽으라고 한다면 끝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고전에 해당합니다.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고독'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데 어려운 이야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독자는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들이 일제히 솟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 감정이었을까를 생각해보다 보면, 부담이 되더라도 다시금 책을 펼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우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주위에 떨어져(p.67)' 버립니다. 딜러는 손님에게 욕망을 표현하기를 권하고, 표현할 욕망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욕망을 빌리라(p.57)'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손님은 '당신과 섞이는 위험 따윈 원하지 않는(p.66)'다고 이야기하면서, 친밀함을 거부한 채 '제로'의 상태로 있기를 원합니다.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의 '나'도 끊임없이 '너'에게 닿고자 말을 이어나가지만, 실제로 '너'가 말을 하는 장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의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두 작품은 개인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비극적인데, 사실상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해서 누군가와 닿고 싶어 하는 것이 본능입니다만, 연인을 사귀고 결혼을 하더라도 원초적인 외로움은 해소되지 않고 마음 한편에 남아버리죠. 끝없이 누군가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의 산물로 언어를 활용합니다만, 결국에는 살아 있는 한, 사람은 혼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에서 딜러가 '정말로 끔찍하고 잔인한 건 한 인간이나 짐승이 다른 인간이나 짐승을 미완성의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p.40)'이라고 이야기한 바가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이야기하는 '미완성'의 상태는 원초적인 고독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딜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개인의 모습을 상징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욕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고독'을 그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원인을 알지 못하고 고독해하고 무력해하는 우리의 모습이 작품 내에서는 추상적인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잡한 말들을 동원하면서까지 어떻게든 그 원인을 규명해보려 하지만 계속 실패할 뿐입니다. 끝내 '너'에게 가닿더라도 '너'의 존재는 이야기에서 부재하고, '나'의 복잡한 말만이 무의미하게 공기 중에 퍼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듯 두 이야기는 타인과 닿고자 하지만 결국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원래부터 고독할 수밖에 없던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여주는 콜테스의 방식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외로움에 괴로워하던 사람들에게 '당연한 거예요'라는 투의 위로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닿고 싶으면서 멀어지고 싶은, 그런 모순은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누군가에게 '닿고 싶다'는 감정이 우리의 본능 중 하나라면, 누군가로부터 한없이 '멀어지고 싶다'는 감정 또한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본능 중 하나입니다. 후자의 본능을 대표하는 대사는 '난 그저 제로이고 싶습니다'로 대표되는 손님의 대사입니다. 손님은 '따뜻한 온정도 싫고, 남과 반드시 친해져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고, 주먹질이라는 폭력 이상으로 우정이라는 폭력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저 잠시 나란히 놓여 있다가 각자의 방향으로 굴러가는 그런 두 개의 제로가' 되기를 딜러에게 권하기도 하고, 딜러를 일부러 화내게 해서 빠르게 상황을 모면하기를 꿈꾸기도 합니다. '단순하고, 외롭고, 오만한 제로가(p.68)' 되고 싶어 하는 손님의 태도와 그에게 가닿기 위해 공감의 언어를 구사하려 하는 딜러의 태도는 타인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의 충돌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다른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순적인 존재니까요.

   그런데 그 모순적인 자아들이 원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나의 전체(p.53)'입니다. 추상적이고 복잡한 단어, 난해한 문장들의 틈새에서 딜러도, 손님도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을 어떤 실체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끝끝내 딜러와 손님은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고, 숲에서의 나는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셈이죠. 오래전에 쓰인 고전을 읽으면서, 그것을 읽기가 너무 힘들면서도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되었던 데에는 저 또한 난해한 문장들 속에서 정체 모를 욕망과 감정의 실체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따금 우리를 찾아오는 정체 모를 불편함과 우울, 그 정체를 밝혀보기 위해 복잡한 언어를 활용한 이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머리를 아프게 하면서도, 실체가 없는 욕망과 고독의 초상화를 탁월하게 그려내고자 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끝끝내 그들은 어딘가로 가닿지 못하고 좌절해버릴 것이지만, 보편적으로 그려진 그 좌절은 무척이나 당연한 것처럼 작품 내에서 그려집니다. 이러한 당연한 좌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외로움과 욕망을 병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당연한 과정으로 여길 수 있게 됩니다.


   "도대체 당신이 뭘 잃고, 내가 뭘 얻지 못했단 말인가요? 우리 둘 모두에게서 사라진 그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요?(p.71)"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을 겪고 있는 우리들은 아마도 손님의 위와 같은 대사를 죽을 날까지 끊임없이 반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끝끝내 딜러가 지적한 것처럼 '결국 이것뿐이었나(p.78)' 하고 외치면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한 삶의 구조인 것처럼 보여주는 콜테스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독자들은 마음속에 있는 공허함이 원래부터 채워지지 못하는 공허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한 느낌을 애써 메우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터득할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설령 거기에 다다르기까지 독자들이 수많은 문장들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불편은 있습니다만, 얼굴 없는 욕망의 초상화를 그려나가는 콜테스의 노력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내적 갈등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보다 안정을 부여해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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