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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Jan 03. 2022

<오늘 뭐 먹지?>, 권여선

푸른여우의 냠냠서재 / 소박하지만 경쾌하게, 감질나는 문장으로

추천 지수는 : ★★★★ (8/10점 : 주의, 새벽에 읽으면 급격히 배고플 수 있음)

   "오늘 안주 뭐 먹지?" / 고작 두 글자 첨가했을 뿐인데 문장에 생기가 돌고 윤기가 흐르고 훅 치고 들어오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p.10)


   인이 인정사정없이 쥐어짠 오이지는 꼬들꼬들을 넘어 오독오독이다. 정말 내 애인이라서가 아니라 이 친구는 악력 하나는 타고났다. 그러니 날 놓치지 않고 잘 붙잡고 사는 것이지 싶다. (p.118)


   원하는 스타일로 먹는 것도 중요하다. 밥 먹을 때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개도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로 음식을 즐길 권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p.139)


   <안녕 주정뱅이>, <아직 멀었다는 말> 등으로 유명하신 권여선 작가님의 음식 산문집입니다. 제목에서 미루어 볼 때 식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 않을까 추측하게 되는데, '내 입맛을 키운 건 팔 할이 소주였다'(p.9)고 서장에서 밝히신 것처럼 이 책은 '안주'에 대한 작가의 기억을 다채롭게 다룬 작품집입니다. 봄이면 부침개, 여름이면 물회 등 계절마다 존재하는 각양각색의 안주들이 작가의 현란한 묘사와 어우러지고 있어, 새벽에 읽으면 심히 배가 고파지는 위험한(?) 책이기도 합니다.


   슬픔을 연주하는 소설가, 안주 앞에서 경쾌해지다

   <아직 멀었다는 말>의 추천사에서 '슬픔의 마에스트로'라고까지 표현되던 작가였기 때문에, 처음에 이 책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는 그 특유의 경쾌함으로 인해 같은 작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작가는 '세상에 만두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p.29)'며 만두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햅쌀밥과 가을무와 갈치 속살'을 겹친 모습을 '삼단 조각케이크(p.168)'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었던 에피소드는 작가의 현재 이야기를 다룬 <졌다, 간짜장에게>였는데, 작가는 '오래전부터 지금의 꼴보다 더 안 좋은 꼴로 오직 간짜장을 먹겠다는 일념으로(p.243)' 들르는 중국집의 직원이 사실은 자신의 팬이었음을 알고 '동작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p.242)'리게 됩니다. 이후 이어지는 번뇌는 '슬픔을 노래하시던 분께 이런 면모가?'라는 색다름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독자들은 평범한 안주마저도 경쾌하게 연주해버리는 작가의 솜씨를 엿보게 되기도 합니다.

   '간짜장은 먹고 싶은데 이 꼴로 그 집에 가도 될까. 이미 보일 꼴 못 보일 꼴 다 보인 판국에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슨? (...) 그렇지, 글을 잘 쓰려면 잘 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간짜장도 먹어야 하고...... 아니다, 아니야! 이 꼴로는 차마 못 간다(p.245)'


   절로 배고파지는 섬세한 안주 묘사, 다양하게 연관되는 기억과 감정

   산문집에서는 봄에서 겨울, 그리고 환절기까지 다양한 안주와 그에 연관된 작가의 기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세밀하면서도 현란한 묘사는 얼핏 보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안주에 윤기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체는 새벽에 읽으면 가히 악마적(?)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하는데, '무와 김이 얼마나 맛있는 조합인지' 얘기하면서, '뜨거운 밥을 구운 김에 싸 먹고 차디찬 동치미 무와 국물을 떠먹'고, '무 위에 부친 두부와 반 가른 삶은 달걀도 얹어 삼층 조림을 만들기도(p.161-163)'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경쾌하게 연주되는 반찬들의 모습에 자연스레 입에 침이 고이기까지 합니다. <물회, 그것도 특!>에서는 '차지고 부드럽게 후루룩 넘어가는 회와 오독오독 씹히는 해산물과 싱싱한 야채와 매콤 새콤한 국물까지 그야말로 통쾌하고 상쾌한 맛(p.97)'을 서술하는 작가를 보고 있으면, 지금과 같은 차디찬 계절에도 물회가 '땡'기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감질나는 묘사는 작가의 다양한 기억들과 연관됩니다. 그 기억은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다양한데, 그것들은 안주의 맛을 살려주면서 동시에 산문 자체의 맛을 살려주기도 합니다. 외갓집 식구들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 면으로 간단히 때우자고 이야기하는 여인들을 언급하며 냉면의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흉측하고 거무죽죽한(p.121)' 나물을 어머니가 '까막고기'라고 속여서 작은언니에게 먹인 이야기 등은 소박한 음식들을 감질나게 만드는데, 경쾌한 산문을 맛보는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까지 가능하게 합니다.


   몰입도는 아쉽더라도, 색다른 안주 에세이

   이처럼 독특한 산문집이지만, 가벼운 에세이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몰입도 자체는 작가의 다른 소설들에 비하면 다소 떨어집니다. 안주에 대한 여러 기억들이 나열되는 산문의 흐름은 친한 사람과의 대화처럼 가볍게 느껴져서 일단 장점이지만, 작가의 흡입력 있던 기존의 소설들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잡다하다는 느낌에 아쉬움을 가질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작가님이 다른 소설에서 보여주셨던 글솜씨는 분명히 산문집 내에서도 발휘되고 있습니다. <솔푸드 꼬막조림>에서 꼬막조림과 연관된 부모의 과거와 현재를 서술해나가는 전개는 다 읽고 나면 한 번에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어 인상적입니다. 경쾌하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는 안주들과 그와 연관되어 서술되는 추억들은 일반적인 음식 에세이와는 또 다른 매력적인 음식 에세이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갈고닦은 언어 감각을 총동원하여 먹는 얘기에 집중(p.149)'하고 있는 작가의 산문집은 때로는 뭉클하게, 때로는 즐겁게 독자들에게 여러 안주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슬픔을 노래하던 연주자라는 인상이 강했던 저와 같은 독자들에게 있어서, 어떤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지 설레는 작가의 모습은 다소 새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작가의 대표 소설집인 <안녕 주정뱅이>도, 줄이면 '안주'라고 이야기하시는 작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쩌면 그간 놓치고 있었을 뿐 이러한 경쾌함도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였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읽는 사람도 절로 입맛을 다시게 되는, 경쾌하면서도 감질나는 산문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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