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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Jul 24. 2021

<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세계관의 총집편, 반복되는 소재와 과감한 시도


"그러나 완전히 올바른 일이나 완전히 올바르지 않은 일이 과연 이 세계에 존재할까?" (p.475)


하루키의 최신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입니다. 발매된 지가 4년이 넘은 책에 '최신'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영 어감이 이상합니다만, 구매 후 4년 넘게 서랍 속에 소설을 방치했던 자신의 나태함을 한탄할 수 밖에는 없겠습니다. 마치 주인공이 구덩이 속에서 방울을 꺼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네요. 다행히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아직까지 장편소설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최신 장편소설'이라는 문구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사실상 하루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의 세계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신 분이라면, 이 작품에서 유독 이전 작품들에서 사용되었던 소재들이 다시 등장한다는 느낌을 받으셨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우선, '바람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말에서는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연상할 수 있죠. 또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이 구멍을 통해서 메타포의 세계로 이동하는 부분은 <태엽 감는 새>에서 오카다 도루가 우물을 통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부분과 비슷하죠. 아내와 모종의 이유로 갈라서게 되는 주인공의 처지 또한 <태엽 감는 새>의 도루와 비슷합니다. 주인공이 요양원에 있는 아마다 도모히코를 통해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들어서는 모습은, <1Q84>의 주인공이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의 침대에서 공기 번데기를 발견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열린 고리를 다시 닫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기사단장의 말은 <해변의 카프카>에서 열린 입구를 다시 닫아야 한다는 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이번 작품은 이전 작품들보다도 하루키 세계관의 총집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화가인 '나'는 아내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고 방황 끝에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고 있던 집에서 살게 됩니다. 뛰어난 화가였던 도모히코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작품을 발견한 그는 그날 이후부터 기묘한 사건들을 겪습니다. 배경의 특성상 전작들보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느낌은 적으며, 심리와 배경 묘사에 좀 더 치중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것이 주인공이 화가라는 설정을 좀 더 부각해주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만, <해변의 카프카>나 <태엽감는 새>와 같은 내용을 기대한 독자 입장에서는 내용이 다소 풍부하지 못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네요. 이전 작품들도 서로 공유하고 있는 소재가 있었습니다만, '새로운 작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데에 반해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는 지난 작품들의 총집편이라는 느낌이 다소 짙어 보입니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을 통해서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이 지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의 흐름 또한, <태엽 감는 새>에서 우물을 발견함으로써 노몬한 전쟁이 지상으로 드러나는 흐름과 맞닿아 있죠.


그렇다고 해서 이번 작품이 총집편으로서의 가치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이번 작품에서는 화가가 과감한 붓터치를 실행하는 것처럼, 아예 이데아와 메타포를 등장인물로 내세우는 파격적인 행보가 눈에 띕니다. 그림에서만 존재했던 기사단장과 긴 머리가 각각 '나는 이데아다.', '저는 메타포입니다.'라며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번 작품도 재밌겠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또한 작중에서 가장 기묘한 지위를 차지하는 '멘시키'라는 인물 또한 이전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개성적인 인물로 등장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죠.


물론 후반부에 등장하는 메타포의 세계는 <태엽 감는 새>의 이공간이나 <해변의 카프카>의 숲 속 세계에 비하면 색채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다 읽고 나서의 감상 또한 여전히 전작보다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풍부하지 못하다는 인상이 강합니다만, 이데아와 메타포를 등장인물로 내보내는 아주 과감한 시도나 독창적인 인물의 등장 또한 하루키 세계관을 여전히 흥미진진하게 읽게 해 줍니다.


주인공이 '악惡'으로 상징되는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를 몇 번이고 그림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장면, 그리고 '무無'로 상징되는 '얼굴 없는 남자'의 초상화를 그려내고자 하는 장면은 하루키를 포함한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소설을 쓰는 목적과도 맞닿아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그려내는 것이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내부에 있는 '악惡'과 '무無'를 완벽하게 그려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그런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늘도 많은 작가들이 펜을 움직이고, 많은 화가들이 붓을 움직일 수 있는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롤로그에서 여전히 '얼굴 없는 남자'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결코 부정적으로 해석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작품에 관한 인터뷰집인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작가는 독자와의 신용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다고 보는 독자도 나중에는 그래도 좋았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신용 관계를 작가는 구축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욕심이나 질투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작품의 명성에 대해서도 관심 없어하시며,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에 신경 쓰시는 모습은 본받고 싶어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감상을 쓰면서도 '이번 작품은 생각보다 별로였어요'라고 얘기하고 있던 저였습니다만, 이렇게 '그래도 좋았어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면 어느덧 작가가 얘기하는 신용관계 속에 저도 포함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카미 미에코 저/홍은주 역,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문학동네 #무라카미하루키 #기사단장죽이기 #푸른여우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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