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달란트 14화

인생공부법, 라디오는 내 친구

by 하늘바람

세희의 어린 시절.

엄마는 오전에 방송하는 건강 상식 티비 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그 시간에 티비 켜 놓기를 잊어버린 날에는 마치 중요한 일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라디오 듣기도 즐겼던 엄마는 평소에 자주 라디오를 켜놓기도 하였다.

다양한 주파수를 들었지만 아나운서가 또박또박 발음하는 클래식이나 시사방송도 자주 들었다.

언젠가.. 세희가 초등학교 6학년 때쯤 이었나?

여름방학 때였다.

하루일상 중에 보습학원을 2시간 정도 다녀왔다.

남은 시간은 라디오를 켜 놓고 보냈었는데, 유행하는 가요를 듣고, 왠지 멋져 보이는 팝송도 들으며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기도 하였다.

엄마는 이야기하였다.

“아나운서들은 말하는 게 저렇게 발음이 좋다.”

“아나운서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저 사람들은 좋은 대학가고 공부를 많이 한 거야.”




엄마는 처녀 때도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 안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고.

참 여러 모습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아나운서들의 바른 발음과 말투를 많이 듣고 그 목소리를 따라서 소리 내어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엄마는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는다.

이모들은 지방으로 시집을 가서 살기도 했지만, 고향의 억양이 배어 있는 그 말투가 있었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서울로 상경하여서 쭉 서울에서 살기는 하였지만, 평소에 사투리를 쓰는 모습은 거의 못 보았다.

외가 친척들이 모여서 이모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 하는 경우에는 이모들처럼 엄마의 말투도 바뀌어 있었다.

억양이나 말투가 귀여웠다.

사투리를 쓰는 엄마의 말투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평소에 엄마는 서울말을 사용하였고 엄마가 생각하는 올바르고 평준화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인 것 같았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일까?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티비를 즐겨 본다.

그 안에서 여러 삶의 모습들을 보고 공감하고 내가 몰랐던 것을 배우고 싶다.

평준화된 삶.

이 세상에서 보통이라도 되는 것.

그렇게 사는 걸 배우는 인생 공부를 하였다.

라디오의 전파를 통해서 저 먼 공간에서 방송을 하는 디제이를 선망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나를 전혀 모르는 디제이였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큰 공감을 받았고 나를 그와 동일시하였고 공감하며 그의 감정을 공유하였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현실의 내가 하는 실없는 이야기에.. 역시나 실없이 대답하고 서로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는 존재가 내 곁에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참 좋았을 것 같다.

그래서 아쉽다.




23살의 세희는 하루 종일 작은 방에 있었다.

책을 보지 않을 때는 방안의 전등을 꺼놓으려 하였고, 하루 온종일 어둔 방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오전에 눈 뜨며 라디오부터 켰다.

오전 8시 20분.

활달하고 야무진 여자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도 함께 기분이 업 되는 것 같다.
저런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저런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멋질 것 같다.’

팝송을 소개하는 자신감 있고 정확한 발음은 그저 부럽다.

이어지는 9시.

조용한 듯, 하지만 조곤조곤하게 이야기 하는 중견 남자 배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연을 읽어주고 신청곡을 들려주며 어떤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격려해주고 힘내라는 응원의 이야기를 해 준다.

여러 음악들을 들으며 깜박 졸았나보다.


오전 11시의 영화음악 프로그램이 하고 있다.

평소에 너무 예쁘다고 생각한 익숙한 목소리의 여자 아나운서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간다.

영화음악 프로그램은 듣다 보면 참 재밌다.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정보를 듣다 보면 흥미로웠고 나중에 보고 싶은 영화를 알게 되어서 좋았다.

내가 어릴 적 마음 안에서 품었던 영화감독의 꿈 같은 건.

그냥.

그저 한순간 꿈이었던 것 같았다.

난 마음 안에 보석을 품었던 돌덩이였나 보다.




오전 12시의 발랄한 개그우먼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라디오를 켜놓고 지내는 하루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디제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연을 듣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흥얼거린다.

그때의 라디오는 세희에게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다.

나의 친구였고,

세상을 알려주는 통로였으며,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 설레임이었다.

특히나 좋아하는 심야라디오 디제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동화 어린왕자의 장미꽃에 길들여진 어린왕자처럼,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 여우처럼.

그렇게 그 존재를 기다리며 그리워하였고.

좋아한다는 감정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밤 1시.

정확하게는 새벽 1시 이다.

그 시간을 기다리며 깨어있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가 힘이 들었지만 세희의 삶에서 그 시간은 너무나 소중했고 쉽게 놓아 버릴 수 없었다.

현재의 삶에서 유의미한 소중하고도 유일한 시간이었다.




심야디제이의 시답잖은 농담을 들으며 조용하고 어두운 방에서 낄낄거렸다.

그 순간에는 이 공간이 힘들지 않다.

오랫동안 친했던 친구와 너무나도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치 내가 저 사람을 알고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재밌고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항상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다.

라디오 개편이라도 할 때면 디제이가 바뀌지 않을까? 맘 졸여야 했고.

어느 디제이는 개인상의 이유로 3년의 기억의 시절을 두고 떠나기도 하였다.

그럴 땐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시간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난 어떡하지..

붙잡을 곳 없는 마음을 두고 시간은 흘렀다.

익숙한 주파수와 그 시간.


어느 날 세희는 귀에 들리는 낯설은 목소리에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그 후에 집중해서 듣던 라디오를 가끔 듣기도 하고 안 듣기도 했다.

두 달의 시간이 지났나보다.

이젠 그 시간이 되면 또 버릇처럼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었다.

세희가 듣는 목소리는 어느덧 익숙해졌고, 새로운 친구를 사귄 듯이 자장가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 시간 즈음이 되면 마치 정해진 시간의 주술처럼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고정한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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