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tvn에서 드라마 <미생>이 방영했었다. 워낙 웹툰으로 유명한 작품이어서 익히 알고 있었는데 드라마로 더욱 생동감 있게 보니 그 감동이 남달랐다. 2014년이면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던 때다. 당시 회사원도 아니었지만 참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매 화마다 꽂히는 명대사들이 더욱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이 드라마가 자주 생각나고, 회사원을 대상으로 한 (유미의 세포들이라든가.) 드라마를 보면 괜히 관심이 가지는 것은 내가 그런 입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미생에 나올 법한 대기업도 아니지만 초창기 멤버로서 어려웠던 초기 시절부터 조금 숨통 트이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함께 해왔다. 조직생활 체질도 아닌 찐INFP인 내가 이 회사를 이렇게 오래(?) 다녔던 것은 나 혼자 잘 버텼다고 말하긴 힘들다. 아니, 사실은 그 반대다.
물론 나 스스로도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지금은 타인의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사람이 이 과거의 탈을 벗고 한 차례 성장하려고 할 때는 필연적으로 스트레스가 동반된다. 변화란 자연스러운 것이라기 보단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때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인 듯하다. 사람이 변화를 꾀할 때, 스스로가 그 변화의 필요성을 알아차리거나 아니면 그를 위해 누군가 말해주거나 거의 둘 중에 하나일 텐데, 전자는 스스로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타인의 입을 통해 나의 허물을 들을 때 그것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스스로 그 계기가 선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변화의 시작은 내가 끊어야 되긴 한다.
타인의 입을 통해 가장 많이 들은 피드백은 '성실한 태도'였다. 워낙에 아침잠이 많은 타입이기도 하고 전날 밤에 '오늘은 일찍 자야지!'하고 마음먹어도 그날따라 유튜브에 왜 이렇게 보고 싶은 영상이 많은지. 아꼈던 영상들 한 차례 보면 연관 동영상을 타고, 타고... 그렇게 늦게 잠듦과 늦게 일어남의 반복이었다. 물론 보통의 회사 같았으면 지각이 계속 이어진다? 눈물 쏙 빠지게 혼쭐이 나고 내가 그만두던가, 잘리던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직업군이 있듯, 다양한 회사가 있어서 내가 다니는 회사는 자율출근제를 채택한 곳이었다. 대표도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입장이라 회사에 늦게 도착하면 늦게 가면 그만이지~라는 마인드가 통했다. 어차피 마감일까지만 완성하면 되는 것이 내 책임의 전부인데 무엇하러 빡세게 하느냐는 것이다.
분위기가 그러하니 나 역시도 그런 느슨함에 감사함을 느끼기보다는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누군가 나를 터치하면 되려 (속으로)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회사가 좀 번듯한 환경 속에 놓여지니 체계를 잡아나가려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율출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부지런한 태도가 필요해진 것이다. 이런 말은 전부터 종종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사실 하루아침에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시간을 점차 땡겨서 일찍 나오긴 했었는데 금세 다시 원래로 돌아가는 것의 반복이었다. 늦게 출근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런 피드백이 머리로는 너무 이해가 되는데 그 말을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죄책감이 들기도 여러 번이었다.
주의를 받을 때마다 씩씩하게 "죄송합니다!!"라고 외치긴 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책의 골이 더욱 깊어져 갔다. 말만 뱉어 놓고선 실천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이 회사에서 미움을 받을 것 같단 생각 때문이었다.
첫머리에 드라마 미생에 대해 잠시 언급했는데, 미생에는 그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누군가가 급히 서류를 챙기다가 한 장의 서류를 누락시켰고 영문 모르는 주인공 장그래가 오해를 샀던 것이다. 그리고 회식을 거나하게 하던 날, 장그래의 상사, 오과장은 실수한 팀원의 팀장에게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말한다. "니네 애가 문서에 풀 묻혀가지고 흘리는 바람에 우리 애만 혼났잖아!"라고 말이다. 극 중에서는 바둑을 그만둔 후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장그래가 '우리 애'라는 단어를 되뇌며 소속감을 느끼고 가만히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 장면이 생각났던 이유는 아마 퇴근 시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던 인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늦게 출근한 그날도 어김없이 카톡으로 주의를 들었다. 힘차게 배꼽인사를 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네!! 죄송합니다!!"를 전송하고 밀려오는 죄책감과 함께 '오늘 일찍 일어난 김에 그냥 일어나지, 왜 다시 잠들어가지고..'를 시전하고 있었다. 일하는 내내 일 모드 반, 자책 반이었을 것이다. 미움을 받을 것 같단 생각에 괜히 '나랑 조직생활을 맞지 않나 봐'까지 가고 있었는데 퇴근 시간이 되자 하나 둘 퇴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중 한 동료가 퇴근 전 나에게 웃는 얼굴로 "저 먼저 갈게요~ 내일 봬요"라고 말했다. 금세 내 마음에는 '다행이다.'란 안도감이 들었다. (정말 나는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실천하려면 멀었다.) 그리고 다른 동료와도 서로에게 웃는 얼굴로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나자, 다시 한번 '다행이다.'는 안도가 찾아왔다.
이제는 정말 부지런해져야겠다는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옳은 방향으로 변화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누군가를 그저 일관적인 마음으로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생긴다. 그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될지, 그리고 우리 인연의 끈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함께 하는 이 시간만큼이라도, 그리고 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