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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eepers Summit Jul 04. 2020

< 발견 그리고 덧댐과 이음 > - 3편

이번 편부터는 본 프로젝트를 통해 선정된 10개의 우리나라의 ‘명품들의 발견 그리고 덧댐과 이음의 과정과 중간 완성 물들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자 한다. (최종 결과물은 디자인 굿즈를 통해 선보여질 예정이다.)

 

명품 A. 고려청자를 만나다.



발견. (중 일부)



발견. (중 일부)


l   발견’ (과거): 한국의 역사 속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유물을 중 10개를 선정하여, ‘명품’이라 칭하고꼭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들을 연구하고 찾아내어현대인들도 이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배치한다. 


   



1. 고려청자의 천하제일의 비색 


단아한 형태 위의 맑은 유약의 푸른 빛깔은 천하제일의 비색이며, 고려의 명품 문화이다.“고려 비색이 천하제일” 중국 송의 태평 노인, 『수중금』, 천하제일조 中 –


중국의 진시황 때부터 황금이 아닌 옥으로 옥새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옥은 권력과 부귀영화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옥의 생산이 한정적이자, 옥빛을 더 많은 곳에 소유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도자기에도 그 빛깔을 담아내길 원했다. 그렇게 탄생한 도자기가 바로 청자이다.


비색의 표기로 ‘비색(祕色)’과 ‘비색(翡色)’이 혼용돼 사용되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누런 빛의 청자와는 달리, 송나라는 10세기에 옥색에 가까운 ‘비색’을 만들어 냈다. 그중 최상품의 청자의 색감을 ‘祕(신비로울 비)’를 사용한 ‘비색(祕色)’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2세기에 고려가 빚어낸 청자의 색깔은 ‘비(翡) 취옥의 색깔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비취옥을 똑 닮은 색으로 ‘비색(翡色)’이라 표기되곤 했다고 전해진다. 


1123년 고려에 방문했던 송의 사신 서긍은 송으로 돌아간 뒤 자신이 기록한 <선화 봉사 고려 도감>에 고려청자의 제작기술과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내용을 담아두기도 했다. 또한 송나라에서 쓰인 책 <수중 금>에서는 ‘고려의 비색청자는 천하제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청자의 비취색이 특별하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에는 “투명함”이 있다. 중국의 청자 또한 그 빛깔은 매우 아름다웠으나 우리나라 청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맑고 청아함/ 투명함”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또한, 청자를 굽다 보면 흙과 유약이 구워지는 온도가 달라서 생기는 미세한 균열(빙렬 무늬)들이 생겨나는데 그 균열이 주는 미감을 즐겼다고 한다. 



2. 고려청자를 사랑한 사람들 



 



(1) 한국인 전형필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산이 헐값에 팔려 해외에 반출되는 일이 많아 안타까웠다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문화유산을 사 모으는데 투자하였다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이 뛰어난 전형필은 ‘상감청자 운학문 매병’은 당시 기와집 20채의 가격인 거금 이만 원에서 한 푼도 깎지 않았다그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2) 영국인 존 개스비 (Sir. John Gadsby) 

일본 도자기를 수집하던 중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 후 20여 년간 고려청자만을 모았다그러나 전쟁 때문에 일본에서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개스비는 자신을 찾아온 한 젊은이에게 고려청자를 모두 팔았다그가 바로 전형필이다그는 “조선인에게 조선의 문화유산을 넘기는 사실이 기쁘다.”라고 말할 만큼 고려청자를 사랑했다


 

2-1 간송 전형필과 영국인 존 개스비와의 비하인드 스토리 

일본 여성과 결혼해 도쿄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 영국의 귀족 출신 존 개스비는 미술품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특히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게 되었다그는 실제로 수많은 청자들을 수집하였고그 가운데 명품 고려청자들이 상당수였다그러던 1935일본에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은 난리 통이 되었다위협을 느낀 개스비는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으나그가 수집해 둔 고려청자가 마음에 걸렸다결국 그는 일본의 거물 수집가들에게 그가 가진 고려청자 22점을 판매하기로 하였다그가 제시했던 금액은 55만 원으로 당시에 경성의 기와집 한 채가 400원이었던 시세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일본의 수집가들을 기다리던 개스비를 찾아온 것은 놀랍게도 조선 청년 간송 전형필이었다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것들을 지켜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개스비와 협상을 해나가기 시작했다결국그의 간절함과 의지에 개스비는 낙찰가 40만 원에 고려청자를 간송에게 넘겨주었고덕분에 간송은 모든 청자들을 바로 조선으로 무사히 옮겨올 수 있었다

 


(위의 내용 외에도 청자에 대한 여러 발견들이 담겨있으니, 최종 결과물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덧댐. (중 일부)

ㅣ‘덧댐’ (현재) :  우리 유물의 정보와 가치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가치관예를 들어‘필자가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과정필자가 느끼는 점들디자이너가 시각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것들역사학자가 개인적으로 더욱 끌리는 내용 그리고 전문가들의 견해’ 등을 덧댄다

 




이번에는 청자에 대한 여러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 중에 깨달은 필자와 디자이너 주혜림, 그리고 역사책 저자 김원미의 해석과 견해를 덧대 두었다. 특히, 디자이너 주혜림은 청자의 비색에 감명받아, 이번 덧댐 들을 ‘각 개인만의 비색’ 컬러칩의 형태로 풀어내었다. 또한 김승민 큐레이터의 우리나라의 도자기에 대한 큐레이터로서의 경험과 추억을 담은 이야기들도 덧대어져 있다.  그중 하나의 컬러칩의 내용을 공개하려 한다. 





고려청자의 수난으로 시작된 미술 시장의 형성

고려청자의 수난사에서 우리나라의 미술품과 골동품 경매 및 거래 시장 형성의 시작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서양인들의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과 수요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일본이 본격적으로 고려청자를 거래해 나가기 20년 정도 전인, 1880년경 개항기에 한국을 찾은 서양의 외교관, 의사, 저널리스트들을 통해 서양인들 또한 우리나라의 청자에 관심을 가졌다. 



칼스(William Carles)가 <조선 풍물지(LifeinKorea)>에 본인이 구입한 것이라고 그려둔 고려청자



당시의 서양인들이 오리엔탈리즘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감에 의해 우리의 청자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 관심의 시작에 경제적인 요인의 작용이 있었다. 그 시기에 서양에서는 동양의 자기는 고가의 미술품이었으며, 특히 중국의 송나라 때의 자기와 일본의 자기가 이미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장이 형성되어 비교적 낮은 가격에 거래되던 고려청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과 시장 형성

그 후, 이토 히로부미의 청자에 대한 관심은 청자와 골동품 시장에 불을 지폈다. 물론, 그 대부분의 청자들은 도굴된 청자들이었다. 1906년 아키오라는 일본인이 도굴된 청자 경매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고려청자는 일본 지배 계층에 의해 감상을 위한 도자기로 소장되었다. 


당시의 고려청자를 구매하는 것은 현대 우리가 말하는 럭셔리 굿즈(명품)를 소비하는 것과 같았다. 럭셔리 굿즈와 같이 상징적인 가치가 큰 상품의 소비가 활성화되는 과정에는 보통 수직적 계층 구조 속 계층들 간의 심리가 작용하게 된다. 최상위 계층은 자신들이 다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고가의 무언가를 소비하곤 한다. 그 아래 계층인 중산층들은 외적으로나마 상위 계층과 같은 소속감을 얻고자, 상위 계층의 소비를 따라 하게 된다. 만약, 그 소비재의 가격을 감당할 정도의 경제적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대체품을 찾기도 한다. 


이런 계층적 소비 심리는 고려청자의 거래에서도 나타났다. 고려청자의 희소성(적은 공급)에 비해 높은 수요는 고려청자의 가격을 높였다. 고려청자가 일본의 지배 계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최상급의 예술품으로 자리 잡게 되자, 일본의 중산층의 사람들도 이를 동경하고 소유하고자 했다. 후에, 그런 중산층의 심리는 고려청자 대신 그 대체재로 조선백자를 구매하게 만들었으며, 백자 판매 시장의 형성으로도 이어지게 했다. 


이 시기를 우리나라의 골동품 및 미술품 시장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 기자의 저서 ‘미술 시장의 탄생’과 2015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근대 미술 시장 형성사 연구’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고려청자의 거래 시장은 일본의 파렴치한 욕심에 의한 우리 문화재의 도굴 및 거래라는 절대 반복돼서는 안 되는 부도덕인 방법에 의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그 소중함과 가치를 더 애틋하게 느끼게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픔을 통해 지켜낸 그 가치가 헛되지 않게, 앞으로도 더욱더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것들을 보살펴 나갔으면 한다. 




 




이음’ 그리고 ‘다시 발견’ (미래)


l   이음’ 그리고 ‘다시 발견’ (미래): 유물을 알아가며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또한 이 글과 디자인 결과물을 보게 될 독자/ 관객과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새로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후에 스스로 더 찾아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길 바란다. 독자가 다시 발견한 이야기들이 우리가 만든 작업물 위에 추가적으로 덧대질 수 있는 형태의 결과물을 제작해 나가려고 한다.





여러분들의 생각하는 고려청자의 매력, 청자와 함께한 추억 등과 같은 해석과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


 



발견 그리고 덧댐과 이음 작업 과정 이미지




 




기획, 글 – 도연희 문화 기획자/기업가

디자인 – 주혜림 디자이너

역사 자문 – 김원미 역사책 저자 

사진, Phosign – 전우성 작가

영상 – 이경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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