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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 재주라도
으레 고리타분한
by
이영희
Jun 27. 2019
이른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제한적이다.
우선 연하게 커피 한잔 내려 한 모금 마신다.
노트북을 열어 브런치를 클릭하고
막 올라오는 제목 중에 확 다가오는 글들을 읽어 내린다.
그러다 보면 나도
자연스레 무엇인가 두드리고 싶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는
삭제키를 누르고 만다.
그제 홍천강가에 살고 있는 선배에게 다녀온 소감의 시작을
이렇게 했다.
너무 가까워지면 '관계'가 개인을 삼키고,
너무 멀어지면 '거리'가 고립을 낳는다.
자유인을 내세우며 고립을 원하는가,
아니면 삼켜져도, 손해 보는 듯해도
누군가를 늘 가까이 두고 싶은지.
부부, 부모, 그리고 나와 알고 지내는 사이와 사이들.
적당한 거리라는 애매모호한 줄자.
난 척, 된 척, 든 척, 거기다 센 척, 고고한 척 해 보아도
가까운 이에게 늘 들키는 외로움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더 이어갈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다시 삭제할까.
이대로 노트북을 탁 닫고 주방으로 가서 반찬이나 만들까,
아니야, 칼이 아닌 키보드로 두부는 자르지 못해도
나를 찾는 소중한 열네 명의 구독자님들에게 그래도
괜히 클릭했다는 불평은 없도록 해야 할 텐데.
생각 끝에 모니터 옆에 놓인 책중에 하나를 펼친다.
그래, 바로 이거다. 내 어리숙한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 문장이
나를 나무란다.
/... 책 속에 길이 있다. 그런데
그 길을 오래 방치해 두니
온통 가시덤불로 막힌 길이 되었다.
읽는 사람도 심드렁해서 으레 고리타분한 말만 쓰여 있으려니 한다.
읽어도 건질 것이 없고
남는 것도 없는, 하지만 꼭 그러할까.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앉아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건 무슨 뜻일까 하며 내 거울에 찬찬히 비추어 보면
준열한 나무람에 정신이 번쩍 돌아온다.
책 속의 말이 물결이 되어 내 몸을 적신다.
글이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눈과 귀가 막혀
글과 말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눈 앞의 영약을 던져두고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처방만 찾아 이리저리 우르르 왔다 갔다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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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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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그림을 즐깁니다. 수필집 <자궁아, 미안해> 2022년 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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