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약아진 나는

by 이영희

"..... 살아서 약아진 나는, 삶을 거머쥘 수 없을 때,

또는 저러한 것도 삶이라고 차마 입에 담아 말할 수 없을 때, 나는 때때로

초월- 극복- 구원- 승화- 종합 - 합일- 지양- 피안- 해탈- 무위라든가, 또는 무슨 뛰어넘기, 껴안기,

열리기, 트이기, 합치기 같은 그런 단어들을 어떻게 좀 맵시 있고 적절하게 써먹음으로써

미소 짓고 싶지만, 중생의 사전 속에 들어 있는 저러한 말들에 눈 길이 미칠 때, 뒤통수가 근지럽고

내장이 뒤틀려서 차마 들먹거리지 못한다. 삶 속에서 확인되지 않은 말들과 내가 살아낼 수 없는

말들이 인간의 사전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신기루처럼 사막의 허공을 밀려다니고, 세월이 갈수록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가용 어휘를 수록한 사전의 두께는 점점 얇아져간다. 나는 이제

얇아져버린 가난한 사전이 슬프지도 안타깝지도 않다. 나는 애써 나 자신에게 그렇게 타이르고 있다.

살아서 약아진 나는, 가용 어휘사전으로부터 도망친 저 신기루의 언어에 의하여 되도록이면

상처 받지 않도록, 그것들의 폭격 위치로부터 나 자신의 몸을 피신시킨다.

나는 초월의 길을 따라갈 수도 없고 이념의 길을 따라갈 수도 없다. 나는 자연의 길을

따라갈 수도 없고 논리의 길을 따라갈 수도 없다. 삶은 진흙뻘에 빠진 네 발 짐승과도 같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네 발을 진흙뻘에 담그고 사전을 들여다보면 말들은 사전 속에서 대열을 벗어나서 달아난다.

나는 네 발을 뻘 속에 묻고, 저 달아나는 말들의 돌아서버린 등을 여전히 흘깃거린다. 나의 삶은

진흙뻘과 말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이고 나의 마음은 현실과 초월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이다. 나는

그것을 참는다. 살아서 약아진 나는 대책 없는 일에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일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 / 김 훈의 산문집에서 발췌



김훈의 말을 두드리고 나니, 황벽 스님의 글이 새삼 다가선다.


번뇌를 멀리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승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 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으리오. / 황벽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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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은 살아서 약아졌다고 말하지만 그만큼 글쟁이의 밥벌이에 매진했음이다.

적당히 약아진 얄팍한 글의 표정이 아닌, 적당하게 정해진 시간이나 지키며 만족하는

그런 인생이 결코 아니었으리라.

자신의 직업이자 작업인 우리말의 어원과 뜻의 실마리를 굳게 붙잡고 한바탕 치열하게 밀어붙인

결과물들이 소설로 산문으로 엮어져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문장마다 간결의 미에 감탄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글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만큼 살아서 약아진 나는, 누군가를 지독히 그리워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살아서 약아진 나는, 큰 일도 작은 일이 되었으며,

그저 살아서 약아진 나는, 한껏 폼을 재는 인간들이 측은하게 보이며,

살아서 약아진 나는, 약아빠진 인간을 가까이 못 오게 할 만큼 약아져 있을 뿐.

살아서 약아진 나는, 이것뿐인가 싶다.


1414545561799_.jpg 2016年 2月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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