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석하지만 출판할 수 없습니다

by 이영희


움베르토 에코의 <작은 일기>. 이 책은 5년 넘게 내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자리 잡고는 거장답게 비스듬히 다리를 외로 꼬고 서서 팔짱을 끼고는 내게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아직은 이 책을 멀리 놓지 말아라. 네 성찰의 폭을 한 뼘 한 뼘 확장시켜 줄 테니'

에코가 섭렵한 방대한 서적을 내가 따라잡을 수는 없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생각한 것들. 나름으로 생각을 여기에 정리해 보지만 내 머릿속엔 너무 많은 잗단 사념들이 개입되곤 한다. 그러다 단어와 문장들이 에코의 눈을 통하고 사유를 통하면 확실하게 명료하게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작은 미소가 아닌 무릎을 푹 꺾고 만다. 독특한 일기다. 그의 글이 쉽지는 않지만 서서히 매료당하기에 충분하다.

에코가 편집자의 입장에서 써 놓은 글 몇 개를 여기에 옮겨본다.




프란츠 카프카, <심판>


짧은 분량의 나쁘지 않은 원고입니다. 가끔 히치콕의 영화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추리 소설입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살인 장면 같은 것은 독자들이 좋아할 겁니다. 그러나 작가는 검열 체제 아래서

원고를 쓴 것 같습니다. 모호한 암시나 이름 없는 사람과 장소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주인공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밝히고 더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건을 전개시키고

사실들을 밝힌다면 행위가 좀 더 명확해질 것이고 서스펜스가 더 확실하게 살아날 겁니다.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젊은 작가들이 <아무개 씨가 어느 곳에서 몇 시에..>라고 쓰는 대신

<한 남자가>라고 쓰는 게 더욱 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원고에 손을

댈 수 있다면 출판하자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게 좋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작품입니다. 너무 길지만 포켓판으로 만든다면 팔릴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대로 출판해서는 안됩니다. 충실한 편집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구두점을 모두

다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문장이 너무 지루한 데다가 한 페이지 전체가 한 문장일 때도 있습니다.

편집 과정 중에 그 문장을 좀 더 잘라 가각 두 세줄 정도로 줄이고 좀 더 자주 새 문장이 등장하게

한다면 분명 지금보다 훨씬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호흡곤란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책입니다.




작자미상, < 성서>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이 원고의 처음 몇백 페이지를 읽었을 때 저는 이 책에 열광했습니다.

아주 역동적이었고 오늘날의 독자들이 현실 도피적인 책에 요구하는 모든 문제가 담겨

있었습니다. 즉 간통, 동성애를 포함한 섹스(수도 없이 나왔습니다), 살인, 근친상간, 전쟁,

대량학살 등에 대한 것들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천사가 되고 싶어 하는 성도착자들이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일화는 라블레 풍입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완전히 살 가리(이탈리아의 소설가)의 작품 같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장면은

조만간 영화화될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말해 극적 반전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비극으로 떨어지지 않고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잘 짜인 대하소설입니다.

그런데 계속 읽어 나가다가 이 작품이 여러 작가들의 선집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시의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애원 조가 두드러지는 데다가 지루하고 정말

시작도 끝도 없는 탄식만 늘어놓는 시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괴한 옴니버스 소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싫어할 위험이 있는

책입니다. 편집자가 직접 여러 작가들과 계약을 맺지 않는다면 이 많은 작가들에게 저작권을

얻어내는 일이 큰 골칫거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편집자의 이름을 그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름을 숨기기라도 해야 하는 듯, 목차에도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처음 다섯 권만 부분적으로 출판할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절망에 빠진 홍해의 사람들> 같은 제목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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