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을 묵힌 火

by 이영희


火病

-- 박용하 --


세상을 버리는 사람처럼

화를 버리게 되지는 않는다

가족을 버리는 사람처럼

화를 버리게 되지는 않는다

가족과 세상을 등지는 사람처럼

화는 서러운 것이다

아내와 딸을 대하는 사람처럼

화를 다스리는 일은 서러운 것이다

여름 한낮 화는 땅에 질질 끌리거나

이글거리고 지글거리는 땡볕을 받느라

없는 살림에 안 나오는 젖 먹이느라

입 헤벌리고 혀 할딱이는 어미 개처럼 힘들어했다

화는 자주 지구 끝까지 갔다가

유조선처럼 겨우 철수했다

언제나 비밀은 사방 십 리 안에 다 있고

언제나 비밀은 식탁 위에 다 있고

세상을 버리는 사람처럼

가족을 등지는 사람처럼

화를 버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게 최고의 비밀이다




어느 모임에서 여류시인은 말했다. 詩는 온갖 경험에서만 나오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경험도 중요하지만 좋은 시와 소설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 '火'가 있어야 된다는. 독하고, 못된 성격, 누군가로부터 당한 부당함을 끝내 잊지 못하여 얼굴 마주하고 대차고 옹골진 목소리로는 싸우지 못하기에 시로 글로 남기는 것이다, 고.

가만히 귀 기울였다.

시인은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는 책을 펼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문장 또는 필이 오는 단어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는 이어지고 과거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며 상상력도 증폭되어 마음에 닿는 그 문장, 그 단어 하나로 자기만의 시는 탄생했다고.




내 이야기 한토막.


몹시 화나는 일이 있었다. 상대방에게 전화로 이야기할까 했지만 나는 화를 다스리지 못해 목소리는 떨리고 전하고자 하는 말을 차근차근하지 못할 게 뻔했다.

편지를 썼다.

에이포 용지 석장에 달하는 글을 키보드로 한 시간을 눌렀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출력했다. 다시 읽어 보고는 책상 서랍에 열흘을 묵혔다. 만약 열흘 후에 꺼내서 읽어보고 이것은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이 들면 미련 없이 찢어버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지 않겠다고.


열흘이 지나고 서랍을 열었다.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내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이 잘 도드라졌다. 우체국을 찾아가 보통우편이 아닌 등기로 부쳤다. 열흘의 공백을 메우고 싶었다.


이틀 후, 전화벨이 울린다.

상대방은 글 잘 받았다며 한 시간을 이야기한다. 누가 이기고 지고는 없다. 내 속상함과 상대방의 속상함이 충분히 전해졌기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말로서 생각을 풀어내는 사람이 있고, 글로서 감정을 풀어내는 사람. 한 사람은 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열흘을 묵혔고 또 한 사람은 한 시간 동안 말을 한다.

두 사람, 서로 '다 내 탓이다`로 마감했다.


화도 이렇게 소심하게 내다니....

열흘을 묵힌 火는 그렇게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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