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로 가는 길
헬싱키 공항의 밤은 한여름에도 서늘했다. 8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위에는 복숭아 색 경량 패딩 점퍼를 입고, 다리에는 헬싱키 시내에 있는 스토크만 백화점에서 구입한 상아색 스카프를 둘렀다. 그리고 텅 비어있는 노르웨지안 항공사 창구 앞 길고 넓은 벤치에 누워 눈을 감았다.
새벽이 되자 공기가 더욱 차가워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역시 공항에는 사람이 많았다. 내 마음속에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피어났다. 사람들은 구석구석 홀로 또는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늦은 시간에 입국해서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른 시간에 출국을 하기 위해 항공사 창구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나는 후자였다.
노르웨지안 창구 옆에는 밤새 영업하는 카페가 있었다. 카페는 넓은 통로를 중심으로 항공사 창구 옆쪽으로 카페 카운터와 좌석이 있고, 통로 건너편 공항 외벽 쪽에 4인 소파석이 여섯 개쯤 있었다. 따뜻한 홍차라도 한 잔 시켜놓고 소파에 몸을 좀 눕힐까 했지만 이미 만석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항의 차가운 나무벤치에 누워 빨리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눈은 감고 있었지만 약간의 불안과 어수선한 주변 환경 탓에 당연히 잠은 오지 않았다. 시간도 느리게 가는 듯했다. 결국 얼마 누워 있지 못하고 뼈가 배기고 아파 일어나 앉았다. 멍하니 바깥을 보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벽에는 초췌한 내 모습과 공항 내부만 빛에 반사되어 보였다.
그때 남은 맥주가 떠올랐다.
핀란드는 9시 이후에 마트에서 술을 판매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
헬싱키에 도착한 날, 나는 숙소에 짐만 던져 넣고, 바로 근처 마트로 갔다. 물과 맥주, 아침에 먹을 소시지, 계란, 빵 등 간단하게 장을 보고 계산을 하려는데, 그때 시간이 9시를 몇 분 넘겼을 때였다. 계산대 직원이 내게 뭐라고 말했다. 내 눈은 방황했다. 직원이 다시 말했다. 나는 눈치로 알아들었다.
9시와 맥주.
나는 맥주 없는 비닐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은 마트에 일찍 갔다. ‘계산은 9시가 되기 전에’를 속으로 외치며 미리 여러 개를 사두었다. 예정대로라면 하루에 하나씩 다 마셨어야 할 맥주였다. 그런데 두 개가 남았다.
하나는 숙소 근처 펍에 가서 한 잔 하느라 남았고, 또 하나는 위경련으로 아팠던 그날의 맥주가 남았다.
그렇게 남은 맥주가 가방에 들어 있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가방에 넣은 걸까.
슬금슬금 하나는 캐리어에 넣어 두고, 하나는 술을 조금 마시면 잠이 잘 올까 싶어서 따버렸다. 그런데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후회했다. 맥주가 차갑기도 했고 그제야 ‘화장실 때문에 곤란해지면 어쩌지’란 생각이 들어 찔끔찔끔 마시다 결국 다 마시지 못하고 절반은 버렸다.
새벽 네 시쯤, 더는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카페로 들어갔다. 벽도 없고 출입문도 없이 개방된 카페였지만, 냉기가 스미던 공항 외벽 유리에서 멀어지기만 했는데도 훨씬 따뜻했다.
따뜻한 홍차와 크로와상 하나를 주문하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28인치 수화물용 캐리어에 브레이크를 걸어 두고 수첩을 꺼내 로마 여행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따뜻한 차가 들어가자 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몸에 긴장이 살짝 풀리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안 되겠다. 잠깐만 엎드리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순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시계를 보니 30분쯤 지났다. 잠깐 졸았지만 졸음이 조금 가셨다.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빈 홍차 잔에 뜨거운 물을 받아와 홀짝홀짝 마셨다. 따뜻한 물로 몸을 데우며 멍하니 앉아 발권 시간이 어서 다가오길 기다렸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7시가 되자마자 미리 예약한 티켓을 발권하기 위해 카페를 나왔다. 그런데 창구에는 항공사 직원이 한 명뿐이었다. 티켓을 확인하고 수화물만 받아주는 직원이었다. 예약한 티켓은 티켓 자동 발매기에서 직접 발권해야 했다.
예약 번호를 누르고, 인쇄된 티켓을 받고, 창구로 캐리어를 끌고 가서 수화물로 보내기만 하면 된다.
내 짐의 무게는 수화물의 기본 무게인 20kg보다 3kg이 초과되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예상한 상황이었다. 무게가 많이 나올 줄 알고 요금을 더 지불할 생각으로 짐을 줄이지 않았다.
그런데 무게를 맞춰오라는 직원의 말에, 내 몸이 내 의지와는 달리 제멋대로 뒤로 가서 커다란 가방을 열고, 유럽 여행 내내 장바구니로 썼던 에코백을 꺼내어 자잘한 짐을 담고 있었다.
‘아, 초과 금액을 낸다고 어떻게 말을 하지……. 이제 늦었나…….’
조금 당황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이 북적이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결국 세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고 직원이 활짝 웃으며 엄지를 척 펼쳐 보이고는 “Good” 하고 말했다.
3kg의 보조 가방이 남았지만 큰 가방을 수화물로 보내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아직 출국 시간은 많이 남았지만 티켓을 들고 출국장으로 갔다. 이른 시간임에도 출국장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일단 좀 자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에서 미리 알아본 수면실을 찾았다. 수면실은 출국장 제일 끝에 있었다. 캡슐에 들어가서 자다가 신청한 시간이 되면 깨워주는 곳이었는데, 생각보다 이용 요금이 비싸서 다시 출국장 안에 비치된 벤치에 앉았다. 자리 사이사이에 있는 콘센트로 휴대전화를 충전하면서 조금 전에 배가 고파서 산 딱딱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었다.
좌석번호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자리에 앉고 보니 비즈니스석이었다. 혹시나 하고 티켓을 여러 번 확인하고 승무원이 서 있는 입구 너머 좌석을 보았다. 옆자리에 앉은 이탈리아 아주머니와 일행이 좌석이 업그레이드가 됐다며 기뻐하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티켓을 일찍 발권해서 인지 비싸게 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피곤한데 잘 됐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무척 졸렸기 때문에 이륙하자마자 좌석을 최대한 평평하게 만들고 잠을 청했다.
안내방송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눈을 떠보니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안전벨트를 매라고 했다. 몽롱한 상태에서 의자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고 안전벨트를 맸다.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옆자리 아주머니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른 승객이 다 내린 뒤, 뒤늦게 비행기에서 내렸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헬싱키와는 너무 다른 로마의 뜨거운 열기가 나를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