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염원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화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 유경의 말에 현혹된 탓이다.
너무나도 매혹적인 혜택이 아닌가.
분명 많은 망자들이 이 혜택을 바라보고 차사를 선택했으리라.
“자세한 사항은 이것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유경이 가방에서 설명서를 꺼내어 건넸다.
화인은 그것을 받아 대충 휘리릭 넘겨보고 입을 열었다.
“결국 성과제라는 거네요.”
화인의 눈이 처음으로 반짝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톡, 톡, 톡.
찻잔 옆에 놓인 화인의 손가락이 일정한 박자로 탁자를 두드렸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임시 거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유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인도 뒤따라 일어났다. 독안과 서도도 슬쩍 눈치를 보며 찻집을 따라나섰다.
***
“다녀왔습니다.”
고삼에게 방학은 사치지만, 종업식 날만큼은 예외였다. 보충 수업도, 야간 자율 학습도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화인은 모처럼 이른 하교에 기분이 좋았다.
“아, 더워. 엄마! 에어컨 안 켰어?”
화인의 엄마, 혜영이 주방에서 비닐장갑을 낀 채로 딸을 마중 나왔다.
“빨리 왔네?”
“오늘 종업식이라 빨리 마친댔잖아.”
“참, 그랬지.”
화인이 방으로 가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싱크대며 식탁에 각종 재료와 반찬통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반찬을 또 해?”
“아, 그게, 마른반찬은 쉬는 날 만들어 둬야지.”
혜영이 에둘러 대답했다.
식구는 고작 셋인데, 식당을 방불케 할 만큼 대량으로 만든 국과 반찬이 척 보아도 족히 20인분은 되었다.
“그만 좀 해!”
화인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은희가 이게 먹고 싶대.”
화인보다 열네 살 많은 혜영의 조카였다. 은희가 염치도 없이 전화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 혜영은 그걸 해줘야 마음이 편해지는 성격이었다.
“그럼 직접 해 먹으라고 하면 되잖아!”
“애 둘을 혼자 키우는데 힘들지. 일하고 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대.”
은희는 지난 3년간 병으로 양친을 연달아 잃고 머지않아 이혼까지 했다. 불행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 점은 화인도 안타깝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반찬을 당당하게 요구해도 되는 이유는 아니지 않은가.
“엄마도 일하고 와서 힘들다 그래. 아니면 반찬값이라도 받던가.”
화인이 이번에는 지지 않고 몰아붙였다.
“준다는 거 엄마가 안 받은 거야.”
혜영이 은희를 두둔하니 화인은 더 화가 났다.
“식비가 세 배로 늘었다며.”
“우리야 둘이 벌지만 은희는 혼자 벌어서 애 둘을 키우잖아. 내년에 벌써 큰 애가 중학교에 들어간대. 이제부터 돈도 더 많이 들 텐데.”
혜영이 어르듯 말했다.
“아, 몰라.”
“우리 딸 매정하네. 엄마는 그렇게 안 키웠는데.”
혜영이 비닐장갑을 벗고 화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렇게 베풀면 언젠가는 다 돌아온다니까.”
“돌아오긴 뭘 돌아와.”
화인의 목소리가 누그러들었다.
“엄마가 늦게라도 우리 딸을 만난 게 외할머니가 평소에 많이 베푼 덕이라고 말했지?”
지금의 은희 나이에 화인을 낳은 혜영은 요즘으로 치면 늦은 출산이 아님에도 늦둥이 취급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베풀면 우리 딸한테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어?”
“치. 몰라.”
화인은 혜영의 팔에 힘이 풀린 틈을 놓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옷 갈아입고 앞집에 좀 갔다 와.”
방문 너머로 혜영이 외쳤다.
“싫어!”
화인은 가방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딩동.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앞집인데요.”
화인이 조신하게 인사했다.
[아, 네. 잠시만요.]
앞집에 혼자 사는 여자가 화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곧장 문을 열었다.
“엄마가 갖다 주라고…….”
작은 반찬통이 담긴 종이 가방을 건네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매번 고마워서 어쩌지. 어머니께 잘 먹겠다고 전해 주세요.”
여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헤.”
화인도 헤실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
그로부터 일주일 뒤, 화인의 가족은 모처럼 시간을 맞춰 여름휴가를 떠났다.
바다가 인접한 도시에 살지만 바다보다 산을 선호하는 화인의 가족은 이번 휴가도 산으로 향했다.
“바로 수영장에 들어가도 돼?”
뒷좌석에 앉은 화인의 목소리가 드물게 들떴다.
혜영이 예민한 고삼을 위한 특별 서비스로 이번 휴가의 숙소를 무려 ‘풀 빌라’로 예약했기 때문이다.
“배고프지 않아? 간단하게 요기는 해야지.”
조수석에 앉은 혜영도 덩달아 신이 났다. 딸 화인뿐 아니라 그동안 고생한 자신과 남편을 위한 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둘 다 신났네.”
화인의 아빠, 태호도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어느새, 화인의 가족이 탄 차가 구불구불한 산길에 진입했다.
“오 분만 참아.”
태호가 화인을 향해 말했다. 길이 구불구불해지자 멀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으응.”
화인이 희게 질린 안색으로 뒷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구구구.
“무슨 소리지?”
화인은 고개만 살짝 들어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헬기가 지나가나.’
콰앙!!
그 순간 검고 커다란 것이 화인의 가족이 탄 차를 사정없이 덮쳤다.
*
화인의 의식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기적이야.”
나이 지긋한 의사가 말했다.
말 그대로 기적적으로 외상은 없었는데, 좀처럼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상태였다고 한다.
“엄마랑 아빠는요?”
화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의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탓이다. 화인은 그저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화인은 밤새 울었다.
일인실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다른 환자들의 원성을 샀을 것이다.
이후 화인은 꼬박 이틀 동안 잠만 잤다. 자꾸만 눈이 잠겨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회진 나온 의사가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화인의 눈이 슬며시 뜨였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화인은 말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아이고, 드디어 일어났네.”
마침 보험을 파는 친척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천만다행이다. 천만다행이야.”
화인이 의식을 잃은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울먹이며 말하던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장례식은, 흑, 그래도 네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미뤘어.”
친척 아주머니는 말하면서도 계속 훌쩍거렸다.
“감사합니다.”
화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녀는 병실도 보험이 있어 일인실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후, 친척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화인이 기력을 되찾자마자 장례식부터 치르고, 사망 신고, 보험 접수, 집안 청소, 기타 등등.
매번 혜영에게 전화해 끈질기게 보험을 권하고, 자기 집안일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화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친척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인이 도움을 받았다.
엄마 혜영이 많이 베푼 덕일 테지.
*
딩동.
빈 집에 혼자 앉아 있던 화인은 간신히 일어나 인터폰을 확인했다.
“누구세요.”
습관적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화인은 문을 열었다.
앞집 여자였다.
“내가 요리를 못해서. 유명한 가게래”
여자가 화인에게 다디단 도넛이 든 상자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이어 여자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가끔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
화인이 시선을 들어 여자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감사합니다.”
여자는 활짝 웃고 돌아섰다. 그 미소에는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화인은 정말로 앞집 여자 나정과 저녁을 먹었다.
“학교 생활은 어때?”
“그냥 그래요.”
화인이 양념 치킨을 젓가락으로 쑤시며 답했다.
“고삼이랬지? 대학은?”
“모르겠어요.”
“혹시 등록금 때문에?”
화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웃기게도 친척 아주머니의 강요로 억지로 들어 두었던 보험이 지금의 화인에게 아주 큰 행운으로 작용했다.
상당한 보험금이 나온 것이다.
“등록금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면 일단 가는 걸 추천할게.”
나정이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며 흘리듯이 말했다.
“좋은 대학이 아니라도 나중에 취업하려면 그게 좋아. 갔는데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 그만두는 방법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의 기회를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화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나정이 건넨 콜라를 마셨다.
그런 화인을 나정이 지그시 바라봤다.
“너 애니 좋아해?”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화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티브이 보면서 먹자.”
식사 장소가 주방에서 거실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정은 능숙하게 OTT에 접속해 애니메이션을 재생시켰다. 생전 처음 보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 티브이 속에서 화려한 액션을 펼쳤다.
그제야 집안을 둘러본 화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 집안이 캐릭터로 도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게 이제야 보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