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사 염화인 06

by 아무



*

아직 해가 다 기울지 않은 저녁, 화인과 독안은 5층 건물의 옥상 난간에 서서 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한 맺힌 망자 최이령이었다.

-우린 지금 망자의 마지막 기억 속에 들어와 있네.

독안이 짧게 설명했다.

서도는 자신이 읽는 기억을 일일이 말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보여주기를 택했다. 그 편이 훨씬 정확하고 간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익숙한 독안은 지체 없이 기억 속의 전경을 빠짐없이 살폈다.

-서도는 어디 있죠?

이런 일이 처음인 화인은 제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서도의 행방을 물었다.

-서도는 저기, 망자 안에 있다네.

화인은 서둘러 상황 파악을 끝내고 망자를 눈으로 좇았다.

최이령은 몹시 지쳐 보였다.

겉으로는 여느 회사원의 퇴근길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그녀의 육신 속 영체(영의 형체, 인간의 신체에 해당)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흐렸다. 당장이라도 스러져버릴 듯이.

-최이령의 영체는 왜 저렇게 흐린 거죠?

-그건 영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네.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기를 빼앗겼거나 과로가 누적되어 기가 고갈된 게지.

-그렇군요.

으흠, 화인의 입술 사이로 침음이 새어 나오고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승에서의 기억이 스쳤기 때문이다. 화인은 이지가 흐려질 정도로 무언가에 시달리는 기분을 잘 알았다.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지만, 더욱 허탈했다.

-염 차사, 저길 보게.

독안이 이령이 걷는 길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오염된 영일세.

독안이 가리킨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중년의 여자가 전봇대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영체가 눈에 띄게 탁했다.

영체는 영이 가진 기운의 성질에 따라 고유의 색을 가진다. 이 색은 영체가 선할수록 선명하고 맑게 유지되는 반면, 악할수록 짙은 먹물처럼 검고 탁해져 고유의 색을 잃고 만다.

하지만 제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구나 실수는 하니까. 때문에 완전무결하게 맑고 선명한 영체는 찾기 힘들었다. 지금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만 봐도 그랬다. 개중에 고유의 색을 선명히 빛내는 이도 있지만, 그런 이들 조차 예외 없이 일정 부분은 오염되어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 중년의 여자는 비교도 안 되게 색이 탁했다.

-영체가 저 정도로 오염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

독안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망자의 한이 저 여인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래서일까. 화인은 중년의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벌써 머릿속에 사건 현장이 그려지는 듯했다.

불쑥 나타난 중년의 여자가 최이령에게 폭언을 쏟아내는 장면, 툭툭 손으로 밀치다 몸싸움으로 번지는 장면, 결국 여자가 망자를 해하고 마는 장면까지 상상하다 문득 망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아차, 타살이 아니었지.

그 순간, 전봇대 뒤에 숨어 있던 중년의 여자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의 시선 끝에는 예상대로 이령이 있었다.

힘없이 느리게 걷던 이령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중년의 여자를 발견했다.

이령이 파드득 놀라 걸음을 멈추자 여자의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날아와 꽂혔다.

“퇴근 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이제야 집에 오는 거니?”

“여긴 어떻게 알고…….”

가라앉은 이령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걸 말로 해야 아니? 이렇게 센스가 없어서야.”

여자가 이령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고 말을 이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5층이지?”

여자는 억지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이령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이령이 온 힘을 다해 버텼다.

“여, 여기서 하세요.”

중년의 여자가 주변을 살피고 인상을 와락 구겼다. 마침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너 미쳤어?”

여자가 이령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놀란 이령이 뿌리칠 새도 없이 그대로 잡아끌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사건 현장을 상상하던 화인이라지만 눈앞에서 이런 광경이 펼쳐지니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망자 안에 있다는 서도도 걱정이었다.

망자의 감정까지 그대로 전염되는 건 아니겠지.

-따라 가세.

화인은 독안을 따라 장소를 이동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여자의 행동은 더 가관이었다. 보는 눈이 없으니 마음 놓고 패악을 부린 것이다. 멱살을 잡은 채로 계단을 앞서 올라가던 여자는 갑자기 힘에 부쳤는지 움켜쥔 손을 홱 놓아 버렸다. 그 탓에 이령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아유, 손톱 부러질 뻔했네.”

여자가 길고 뾰족한 손톱을 이리저리 살펴본 다음 이령을 향해 턱짓했다.

그것을 본 이령이 느리게 계단을 올랐다. 여자보다 앞서게 된 이령. 그러자 여자가 이령을 앞으로 밀쳤다. 이번에는 이령을 앞세우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뒤를 막은 것이다.

“왜 이렇게 굼떠.”

중간중간 손톱으로 이령의 등허리를 꾹꾹 찌르는 짓도 빼먹지 않았다.

화인은 화가 났다. 여자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한 대 쥐어박고 싶네요.

-참으시게. 이런 일이 태반이니.

독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 힘겹게 집에 도착했을 이령은 떨리는 손으로 겨우 현관문을 열었다.

여자는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 그 속으로 이령을 거칠게 밀어 넣었다.

“왜 꼭 사람을 찾아오게 만들어! 귀찮게. 그리고, 이사는 언제 한 거야.”

이번에는 찾는 데 오래 걸렸다며 여자가 투덜거렸다.

“이, 이번 달 생활비는, 보내드렸잖아요.”

“나더러 고작 그런 푼돈으로 생활을 하라고?”

“저, 이제 돈 없어요. 진짜예요.”

이령은 담담한 척 말했지만 가련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이 담겼다.

“얘, 누가 보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다.”

여자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이를 지켜보는 화인의 귀에는 한없이 밉살스럽게 들렸다.

그 후, 중년의 여자가 절망에 빠진 이령에게 손찌검을 하고 협박뿐인 폭언을 쏟아내고 남은 돈을 모조리 빼앗기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상습적인 갈취가 아니라면 그럴 수가 없었다.

여자는 아주 노련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현관문을 빠져나가는 여자를 뒤로 하고 독안이 조용히 침음을 흘렸다.

-이제 그만 봐도 되겠소.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으니 여기서 멈추자는 뜻이었다.

휘이익.

독안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허공에 매달린 제 육신 앞에 우두커니 선 이령의 영과 마주한 상태로, 돌아왔다. 이령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고생했다, 서도야.”

독안이 서도를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기억에서 빠져나온 직후이기 때문일까, 서도는 살며시 눈을 뜨고도 멍한 얼굴로 잠시간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머지않아 서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망자를 바라보는 서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치는 게 아닌가.

화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역시, 망자의 감정까지 전염이 되는구나.

독안이 서도의 능력을 이용하기 전에 왜 그렇게 기분이 언짢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서도가 옷소매로 쓱쓱 눈물을 닦고 이령의 영과 마주 섰다.

“그래, 정화부터 하자꾸나.”

독안이 낮게 중얼거리자 서도가 동그란 뒤통수를 끄덕이고 영을 향해 두 손을 내뻗었다. 앞으로 뻗은 서도의 두 손에서 노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손에서 시작된 노란빛은 삽시에 영을 다 휘감을 정도로 크게 번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말끔하게 씻긴 이령의 영이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푸르던 안색이 희게 바뀌었고 당장이라도 스러질 듯 흐리던 영체도 보다 선명해졌다. 하지만 어딘가 파리하고 음울한 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할 일을 마친 서도는 곧장 뒤돌아 독안과 화인 사이로 와 섰다. 독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서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다소 거칠지만 다정함이 배었다.

“수고했다.”

서도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감정은 정화가 안 되나요?”

화인이 정화가 특기인 서도에게 손을 내밀며 독안에게 물었다.

“안 될 리가 있나. 하지만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은 별개라네.”

독안이 서도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애석하게도 서도는 스스로 정화하는 힘은 없지.”

“그렇군요.”

서도와 맞잡은 손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아직 영력도 발현되지 않은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위로하고 싶어서.

화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감정을 정화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내 눈을 뜨고 망자에게 시선을 옮기려고 할 때, 저를 감싼 기류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봄바람이 살랑 불었다.

바람?

화인이 어리둥절하여 시선을 얼른 옆으로 옮기자 독안과 서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화인의 손 끝에서 노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란빛은 맞잡은 손을 타고 서도를 향해 뻗어 나갔다. 서도가 보여준 정화처럼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멈추지 않고 차근히 서도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화인이 발산한 영력은 서도의 온몸을 휘감고 잠시간 빛을 발한 뒤, 이내 사라졌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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