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에 의해 서도가 정화되었다.
이로써 서도가 품었던 이령의 감정이 씻겨 나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화인은 그저 기뻤다.
드디어 나도 영력이 발현되었다!
수습 기간 동안 행한 여러 충격 요법에도 꿈쩍하지 않던 영력이 드디어!
화인은 빛이 사라진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명치를 옥죄는 고통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으흑.”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도에게 전염되었던 이령의 감정이 정화되는 과정에서 화인에게 옮은 듯했다.
이령에게 맺힌 한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명치가 꽉 막힌 듯 갑갑해졌다. 이령의 인생 중에 고작 그 짧은 순간만을 봤을 뿐인데 마음에는 돌이 얹혔다.
화인은 이미 고통이 사라진 명치 부근의 옷을 틀어쥐고 이령의 영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가야 해요. 당신을 위해.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요.”
화인이 말했다.
그러나 이령은 여전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눈물을 닦으며 슬쩍 독안의 눈치를 살핀 화인이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에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거예요.”
이령의 기억과 감정으로 유추해 볼 때, 그 중년의 여자는 누가 보아도 그녀와 가까운 사이였다.
화인은 친모든 계모든 모친으로 추정하고 이런 제안을 꺼냈다.
사실 이 제안은 막 평차사가 된 화인이 입에 올리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인이 과감히 입 밖으로 내뱉은 연유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독안이다.
그는 거친 외관과는 달리 정에 약했다. 서도를 제 아들처럼 보살피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건 불가하네.”
독안이 단칼에 거절했다.
“규율 위반이라는 걸 그대도 알지 않나.”
“네, 그렇죠. 하지만…….”
단호한 독안의 반응에 조금 당황한 화인은 변명을 늘어놓으려다 실패했다.
그때, 드디어 이령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부탁, 드립니다.”
독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령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곤란하오.”
어느새 눈물이 마른 이령이 독안을 직시했다.
“부탁드릴게요. 가족에게 꼭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요.”
두 손을 모으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령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담겼다.
“제발요.”
독안이 침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고민에 빠진 것이다.
화인은 독안이 고민을 빨리 끝내기를 바랐다. 당연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제와 말하자면 화인은 이 집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이령의 영체는 정화로 말끔해졌지만 그 뒤로 보이는 육신이 허공에 매달린 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처참한 광경이 수시로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얼굴이 보일 때면 화인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행히 독안의 고민을 그리 길지 않았다.
“좋소. 인사하러 갑시다. 대신 얌전히 가야 하오. 알겠소?”
이령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약속할 수 있겠소?”
“약속할게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대답했다.
“약속을 어기면 강제 연행은 물론이고 신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명심하시오.”
독안의 으름장에도 이령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장서시오.”
화인은 드디어 이령의 집에서 벗어났다.
*
“여기예요.”
작고 낡은 주택 앞에 서서 이령이 말했다.
“여기가 제 어머니와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이에요.”
이령을 따라 삼차사는 그대로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저 여인이 당신이 만나고 싶어 한 가족이오?
독안이 집 안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물었다.
-네. 맞아요.
독안이 침음을 삼켰다.
-저 여인은…….
-제 어머니예요.
이령이 평연히 답했다.
독안도 예상 못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틀리길 바란 예상이 적중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터.
그 마음만은 화인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옆은 제 동생이고요.
이령의 입가에 비죽 미소가 걸렸다.
이령의 어머니 경애와 여동생 세령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아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령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인사를 하려면 얼굴이 보여야 할 텐데요.
화인이 입을 가리고 독안에게 속삭였다.
-기다려 보게나.
독안도 입을 가리고 화인에게 속삭였다. 둘 사이에 끼여 있던 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독안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때문에 화인도 이령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좋아요?”
이령의 영체가 선명하게 빛났다. 스스로 영기를 증폭시켜 시각화한 것이다. 대단한 집념이었다.
“뭐야? 언제 왔어?”
세령은 힐끗 보고 관심을 껐다. 경애는 아예 모르는 체했다.
아직 이령의 소식을 듣지 못한 탓일 테지.
“내 돈 다 빼앗아 가니까 좋냐고요.”
이령은 분노하면서도 차분하게 말했다. 다만 언성이 조금 높아진 탓인지 그제야 두 여자가 관심을 보였다.
“이깟 돈 몇 푼 된다고, 쯧. 고작 이 푼돈으로 유세 떨러 왔니?”
경애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네 아비가 돈을 안 주는데, 너라도 날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냐!”
-허어.
경애의 뻔뻔한 발언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화인과 독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마침 잘 왔다. 내가 아까는 까먹고 말 안 했는데, 곧 세령이 등록금도 내야 하니까 그것도 마련해 놔라, 알겠니?”
끝내 이령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아, 제가 왜요?”
“이게 머리 좀 컸다고 자꾸 대드네”
울컥 화가 치솟은 경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큭, 큭, 크크크큭.”
그 순간 이령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너, 미쳤어?”
처음 보는 이령의 모습에 당황한 경애가 말을 더듬었다.
“당신, 걸핏하면 내가 못나서 아빠가 도망갔다고 했지?”
이령이 웃음을 거두고 말을 쏟아냈다.
“아니!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당신이 못나서야. 당신처럼 무능하고 게으른데 욕심만 많은 여자는, 누구라도 버리고 도망갈걸? 나 같아도 당신이랑은 안 살아.”
경애가 놀라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니까 애초에 당신이 문제였다고. 그 고약한 성미를 대체 누가 감당하겠어. 할 줄 아는 거라곤 돈타령이랑 불평뿐인 내연녀를, 누가 데리고 살겠냐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경애가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떠는 경애를 보고도 이령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난, 당신이 내 엄마니까. 아빠에게는 내연녀고, 그 가족들에게는 불륜녀지만, 나한테는 엄마니까. 고약하고 악독한 여자지만 언젠가는 내게도 사랑을 주겠지, 하고 참았어. 다 빼앗기면서도 참고 살았다고. 고작 그 사랑 하나를 받기 위해서.”
이령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나도 참 멍청했지. 진작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어야 했는데.”
이령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왕 달아나는 거 아주 멀리 떠났어야 했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미련 없이…….”
이령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이걸 죽고 나서야 깨닫다니. 나도 정말 바보야.”
“뭐?”
두 여자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자, 장난치지 마! 죽은 사람이 어떻게 여길 와!”
세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큼.
그때 화인이 헛기침으로 신호를 보냈다.
“장난?”
이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경애와 세령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이령 옆에 귀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둘이나.
검은 옷을 입은 처녀 귀신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동자 귀신이었다.
경애와 세령은 잘못 본 것이라 믿고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뒤가 내비치는 귀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귀신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서늘했다.
공포에 질린 두 여자가 팔을 허우적대며 뒷걸음질 치다 우당탕탕 넘어졌다.
그 광경을 본 동자 귀신이 킥, 하고 웃더니 스르륵 모습을 감추었다.
사실 이것은 서도와 화인이 영체를 슬쩍 드러낸 것이었다. 독안도 말리지 않았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두 사람이 놀라 자빠지는 것을 보고 만족감을 느끼며 다시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둘의 장난에 이령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당신! 내가 아빠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날 그토록 괴롭혔지?”
경애를 보는 이령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내가 죽는 날까지 괴롭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당신이 죽을 때까지 내가 망령이 되어 따라다닐 테니까.”
이어 이령은 세령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도 마찬가지야, 최세령. 엄마 뒤에 숨어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네가 가진 행복은 다 네 것이 아니야. 내게서 빼앗은 거지.”
이령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어디 둘이 한 번 잘 살아 봐.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내가 끝까지 쫓아가서 지켜볼 테니까.”
쏟아져 나오던 이령이 말이 잦아들자 독안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겠소.
-네, 이제 다 했어요.
형형한 눈빛을 거두고 감정이 한층 누그러든 목소리로 이령이 답했다
-이 일로 악업이 쌓이면 당신만 힘들어질 텐데, 후회하지 않겠소?
-네, 후회하지 않아요. 이 한을 품고 가는 게 더 후회스러운 일이죠.
이령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독안의 얼굴에도 다소 근심이 가셨다.
그리고 그때,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화인에 의해 서도가 정화되었다.
이로써 서도가 품었던 이령의 감정이 씻겨 나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화인은 그저 기뻤다.
드디어 나도 영력이 발현되었다!
수습 기간 동안 행한 여러 충격 요법에도 꿈쩍하지 않던 영력이 드디어!
화인은 빛이 사라진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명치를 옥죄는 고통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으흑.”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도에게 전염되었던 이령의 감정이 정화되는 과정에서 화인에게 옮은 듯했다.
이령에게 맺힌 한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명치가 꽉 막힌 듯 갑갑해졌다. 이령의 인생 중에 고작 그 짧은 순간만을 봤을 뿐인데 마음에는 돌이 얹혔다.
화인은 이미 고통이 사라진 명치 부근의 옷을 틀어쥐고 이령의 영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가야 해요. 당신을 위해.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요.”
화인이 말했다.
그러나 이령은 여전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눈물을 닦으며 슬쩍 독안의 눈치를 살핀 화인이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에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거예요.”
이령의 기억과 감정으로 유추해 볼 때, 그 중년의 여자는 누가 보아도 그녀와 가까운 사이였다.
화인은 친모든 계모든 모친으로 추정하고 이런 제안을 꺼냈다.
사실 이 제안은 막 평차사가 된 화인이 입에 올리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인이 과감히 입 밖으로 내뱉은 연유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독안이다.
그는 거친 외관과는 달리 정에 약했다. 서도를 제 아들처럼 보살피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건 불가하네.”
독안이 단칼에 거절했다.
“규율 위반이라는 걸 그대도 알지 않나.”
“네, 그렇죠. 하지만…….”
단호한 독안의 반응에 조금 당황한 화인은 변명을 늘어놓으려다 실패했다.
그때, 드디어 이령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부탁, 드립니다.”
독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령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곤란하오.”
어느새 눈물이 마른 이령이 독안을 직시했다.
“부탁드릴게요. 가족에게 꼭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요.”
두 손을 모으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령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담겼다.
“제발요.”
독안이 침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고민에 빠진 것이다.
화인은 독안이 고민을 빨리 끝내기를 바랐다. 당연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제와 말하자면 화인은 이 집에서 얼른 벗어 나고 싶었다.
이령의 영체는 정화로 말끔해졌지만 그 뒤로 보이는 육신이 허공에 매달린 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처참한 광경이 수시로 시야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얼굴이 보일 때면 화인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행히 독안의 고민을 그리 길지 않았다.
“좋소. 인사하러 갑시다. 대신 얌전히 가야 하오. 알겠소?”
이령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약속할 수 있겠소?”
“약속할게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대답했다.
“약속을 어기면 강제 연행은 물론이고 신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명심하시오.”
독안의 으름장에도 이령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장 서시오.”
화인은 드디어 이령의 집에서 벗어났다.
*
“여기예요.”
작고 낡은 주택 앞에 서서 이령이 말했다.
“여기가 제 어머니와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이에요.”
이령을 따라 삼차사는 그대로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저 여인이 당신이 만나고 싶어한 가족이오?
독안이 집 안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물었다.
-네. 맞아요.
독안이 침음을 삼켰다.
-저 여인은…….
-제 어머니예요.
이령이 평연히 답했다.
독안도 예상 못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틀리길 바란 예상이 적중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터.
그 마음만은 화인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옆은 제 동생이고요.
이령의 입가에 비죽 미소가 걸렸다.
이령의 어머니 경애와 여동생 세령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아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령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인사를 하려면 얼굴이 보여야 할 텐데요.
화인이 입을 가리고 독안에게 속삭였다.
-기다려 보게나.
독안도 입을 가리고 화인에게 속삭였다. 둘 사이에 끼여 있던 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독안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때문에 화인도 이령을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좋아요?”
이령의 영체가 선명하게 빛났다. 스스로 영기를 증폭시켜 시각화한 것이다. 대단한 집념이었다.
“뭐야? 언제 왔어?”
세령은 힐끗 보고 관심을 껐다. 경애는 아예 모르는 체 했다.
아직 이령의 소식을 듣지 못한 탓일 테지.
“내 돈 다 빼앗아 가니까 좋냐고요.”
이령은 분노하면서도 차분하게 말했다. 다만 언성이 조금 높아진 탓인지 그제야 두 여자가 관심을 보였다.
“이깟 돈 몇 푼 된다고, 쯧. 고작 이 푼돈으로 유세 떨러 왔니?”
경애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네 아비가 돈을 안 주는데, 너라도 날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냐!”
-허어.
경애의 뻔뻔한 발언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화인과 독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마침 잘 왔다. 내가 아까는 까먹고 말 안 했는데, 곧 세령이 등록금도 내야하니까 그것도 마련해 놔라, 알겠니?”
끝내 이령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아, 제가 왜요?”
“이게 머리 좀 컸다고 자꾸 대드네”
울컥 화가 치솟은 경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큭, 큭, 크크크큭.”
그 순간 이령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너, 미쳤어?”
처음 보는 이령의 모습에 당황한 경애가 말을 더듬었다.
“당신, 걸핏하면 내가 못나서 아빠가 도망갔다고 했지?”
이령이 웃음을 거두고 말을 쏟아냈다.
“아니!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당신이 못나서야. 당신처럼 무능하고 게으른데 욕심만 많은 여자는, 누구라도 버리고 도망갈 걸? 나 같아도 당신이랑은 안 살아.”
경애가 놀라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니까 애초에 당신이 문제였다고. 그 고약한 성미를 대체 누가 감당하겠어. 할 줄 아는 거라곤 돈 타령이랑 불평뿐인 내연녀를, 누가 데리고 살겠냐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경애가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떠는 경애를 보고도 이령은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난, 당신이 내 엄마니까. 아빠에게는 내연녀고, 그 가족들에게는 불륜녀지만, 나한테는 엄마니까. 고약하고 악독한 여자지만 언제가는 내게도 사랑을 주겠지, 하고 참았어. 다 빼앗기면서도 참고 살았다고. 고작 그 사랑 하나를 받기 위해서.”
이령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나도 참 멍청했지. 진작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어야 했는데.”
이령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왕 달아나는 거 아주 멀리 떠났어야 했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미련 없이…….”
이령은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이걸 죽고 나서야 깨닫다니. 나도 정말 바보야.”
“뭐?”
두 여자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자, 장난치지 마! 죽은 사람이 어떻게 여길 와!”
세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큼.
그때 화인이 헛기침으로 신호를 보냈다.
“장난?”
이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경애와 세령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나왔다.
“끄아아악!!”
이령 옆에 귀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둘이나.
검은 옷을 입은 처녀 귀신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동자 귀신이었다.
경애와 세령은 잘못 본 것이라 믿고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뒤가 내비치는 귀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귀신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서늘했다.
공포에 질린 두 여자가 팔을 허우적대며 뒷걸음질 치다 우당탕탕 넘어졌다.
그 광경을 본 동자 귀신이 킥, 하고 웃더니 스르륵 모습을 감추었다.
사실 이것은 서도와 화인이 영체를 슬쩍 드러낸 것이었다. 독안도 말리지 않았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두 사람이 놀라 자빠지는 것을 보고 만족감을 느끼며 다시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둘의 장난에 이령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당신! 내가 아빠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날 그토록 괴롭혔지?”
경애를 보는 이령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내가 죽는 날까지 괴롭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당신이 죽을 때까지 내가 망령이 되어 따라다닐 테니까.”
이어 이령은 세령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도 마찬가지야, 최세령. 엄마 뒤에 숨어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네가 가진 행복은 다 네 것이 아니야. 내게서 빼앗은 거지.”
이령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어디 둘이 한 번 잘 살아 봐.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내가 끝까지 쫒아가서 지켜볼 테니까.”
쏟아져 나오던 이령이 말이 잦아들자 독안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겠소.
-네, 이제 다 했어요.
형형한 눈빛을 거두고 감정이 한층 누그러든 목소리로 이령이 답했다
-이 일로 악업이 쌓이면 당신만 힘들어질 텐데, 후회하지 않겠소?
-네, 후회하지 않아요. 이 한을 품고 가는 게 더 후회스러운 일이죠.
이령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독안의 얼굴에도 다소 근심이 가셨다.
그리고 그때,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