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사 염화인 11

by 아무



-으흑!

명치가 타들어갈 듯한 고통에 화인이 신음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염 차사?

선율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화인을 붙잡았다.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서도가 보여주는 기억과는 별개로 화인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환…각?

백색 무복에 붉은 띠를 두른 무당이 주술을 행하는 장면이었다.

조금 전, 무당이 환명술을 행할 때 느낀 기시감은 이 기억 때문일까.

그러나 이것은 화인의 기억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기억일까.

아득해진 시야 속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가물거리는 눈꺼풀이 번갈아 강제로 치뜨였다.

-정신 차려라.

무헌이었다.

-으으……, 으응?

화인이 눈을 번쩍 떴다. 뱃속에 들끓던 열과 명치를 옥죄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떻게 된 일이죠?

화인이 붉은빛을 희미하게 발하는 제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발현이다.

무헌은 다시 제 자리로 가 섰다.

붉은빛 속에 푸른빛이 섞인 걸로 보아 무헌의 냉기가 화인의 열기를 식혀 주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시치미를 뗐다.

-어제는 흙 속성 정화력이 발현됐다고 들었어요.

선율이 화인을 바로 세웠다.

-이번에는 색이 붉은 걸 보니 불 속성이네요. 다음에는 어떤 영력이 발현될지 정말 기대되네요.

선율이 손을 맞대고 환히 웃었다.

‘처, 천사!’

화인은 괜히 쑥스러워 헤헤 웃고 말았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닐 텐데.

무헌이 아니꼽다는 듯 여인을 향해 턱짓을 했다.

아차차.

무헌은 멈추었던 서도의 기억을 다시 재생했다.

독안의 영기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여인 또한 강하게 검붉은 영기를 내뿜었다. 눈으로 보아도 진득함이 느껴질 만큼 밀도 높은 영기였다.

“어리석은 사자들 같으니.”

여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이었다. 벽처럼 선 검붉은 영기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휘리릭.

독안이 창을 휘둘렀다.

심녹색의 창에 가로막힌 검붉은 화살이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이어 독안이 휘두른 창의 궤적에 따라 방어막이 생겼다.

“끝내 이리 나오겠다, 이거요?”

독안이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승기가 보이는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승기가 보인다고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소.”

말을 마친 독안이 비스듬히 창을 휘두르자 심녹색의 영력이 날카롭게 벼려져 날아갔다.

그러나 영력은 여인에게 가 닿지 못했다. 검붉은 영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은 탓이다.

“흐음.”

독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목을 울렸다.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서도야.”

독안의 부름에 서도가 즉각 반응했다.

떨리는 손으로 차사패를 꺼내어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수초 후, 회혼부의 호출에 잠행부 흑조가 응답했다.

*

“환명술부터 파훼하는 게 좋겠네요.”

서도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잠행부 중 선율이 먼저 말을 꺼냈다.

파직, 파지직.

그때,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무헌의 빙결을 깨뜨리고 빠져나왔다.

“네 이놈!!”

화인은 여인이 호통 치는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심장이 있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무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턱을 쓸며 감탄했다.

“제법이군. 염 차사의 열기 때문인가.”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푸른 영력을 흩뿌렸다.

“아직 대화 중이다. 기다려라.”

과연 염라국 최강 차사다운 언동이었달까.

“태 수석, 자네 혹시 환명술 파훼법을 알고 있나?”

독안이 물었다.

“모른다.”

나머지 네 차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일제히 무헌을 쳐다보았다.

“그, 그럼 어떻게……?”

서도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지금부터 방법을 찾아야지.”

“방법을 찾는 동안 저 여인이 또 깨고 나올지도 모르니 제가 막고 있을게요.”

“고맙소.”

선율이 전면에 나섰다.

때마침 여인이 다시 빙결을 깨뜨리고 호통쳤다.

“감히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그와 동시에 여인이 강하게 내뿜은 영기 속에서 수십 개의 단검이 나타나 날아들었다.

“흐음, 너무 예측대로 움직이니까 재미없네요.”

선율의 영체에서 하얀 영기가 솟아났다. 그러자 날아오던 단검이 그대로 뒤돌아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여인이 인상을 팍 구기고 손을 휘저었다.

툭, 투두두둑.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이번에는 제가 재밌는 거 보여드릴까요?”

선율이 웃으며 제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이게 끝도 없이 자란답니다.”

선율의 머리에서 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구불구불 움직일 수도 있어요.”

여인을 향해 뻗어나가던 뿔이 정말로 상하좌우 자유롭게 움직였다.

“재밌죠?”

선율이 해사하게 웃으며 여인을 희롱했다.

그 사이 뒤에서는 주술을 파훼할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귀찮은데 둘 다 데려가지.”

무헌의 발언에 독안이 기겁했다.

“박일태는 무슨 죄인가.”

“그럼, 최만식의 영을 사멸시킬까?”

“사멸이라니!”

무헌이 골똘히 생각하는 척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독안이 경악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영을 사멸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거지.”

“내세가 있지 않나.”

“보아하니 죄업도 많은데 지옥에서 수백 년 형벌을 받고 내세로 가느니, 내세를 포기하고 그냥 사멸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무헌이 흘긋 시선을 던지자 최만식이 기회를 포착했다. 최만식이 벌벌 떨며 무헌을 향해 입을 떠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사자님! 살려 주십시오!”

그에게 대기업 회장의 체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여기 이 젊은이와 저는 이미 거래가 끝났습니다. 그러니 제발 바뀐 이름대로 데려가 주십시오.”

무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저 하잘 것 없는 박일태보다 대기업의 회장인 제가 이승에 남아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입 다물고 찌그러져 있어라. 정말로 사멸당하고 싶지 않거든.”

“아니! 저느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선을 긋는 무헌.

“흐읍, 흡, 흡!”

그러자 최만식의 입이 딱 붙었다.

“이제 좀 조용하군.”

무헌이 흡족한 듯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명부를 고칠 순 없나요?”

화인이 물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일이 복잡해지네.”

독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로선 명부를 고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하지.”

“염라대왕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이 명부일세. 그런데 일개 차사인 우리가 어떻게 고친다는 말인가.”

“내가 살생부의 동자판관을 설득해 보겠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야.”

“그럼 염라의 귀에도 들어갈 것 아닌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독안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금술이 발각되지 않나. 그럼 저 무당은 물론이고 여기 박일태도 신벌을 받을 걸세.”

“그 정도 각오도 없었다면 금술을 쓰질 말았어야지.”

무헌이 단호하게 말하자 독안이 구슬리듯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찝찝하단 말이야. 어떻게 명부의 때를 정확히 알고 딱 맞춰 주술을 준비했는지.”

“저 노친네가 알려줬나 보지.”

“제 아무리 조상신이라도 중음을 떠도는 자가 명부의 때를 어찌 안단 말인가.”

독안의 말에 무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시간에 벌써 설득하고 왔겠군.”

끙, 독안의 목에서 침음이 울렸다.

“그럼 환명술을 한 번 더 하면 안 되나요?”

화인이 또 물었다.

“그건 박일태의 영체가 못 버틸 거다.”

무헌이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독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주술이라는 게, 겉보기에는 무당이 다 제 힘으로 부리는 것 같아도, 사실은 반씩 부담하는 걸세. 주술자 반, 피주술자 반. 그러니 부담이 큰 주술을 연이어 받으면 박일태의 영기가 축나 그대로 사멸될지도 모르네.”

“흠, 그렇군요.”

화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갑자기 화색을 띠며 외쳤다.

“무복!”

불현듯 머릿속에 두 장면이 겹쳐 떠오른 것이다. 누구의 기억인지 알 수 없는 기억과 의복실에서 입었던 하얀 무복.

“무복? 무당들이 입는 저런 옷 말인가?”

독안이 무당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네! 그 무복이요.”

화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오늘 의복실에 근무복을 받으러 갔는데, 후보 중에 무복이 있었거든요. 그 무복이 주술을 무효화시키는 기능이 있대요.”

화인의 설명을 듣는 독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게다가 상성이 좋으면 어떤 주술이든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했으니까, 운이 좋으면 환명술도 없앨 수 있지 않을까요?”

“흐음, 개중 제일 나은 의견이긴 하다만, 이미 지워진 진명이 되살아날지, 어떨지…….”

독안의 말투가 영 내키지 않는 듯 들렸다.

“그건 걱정 마라. 진명이라면 내가 새길 수 있다.”

그때 무헌이 끼어들어 여상히 말했다.

“어쨌거나 나도 염라의 자손이니까.”

화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튼 그 옷은 내가 받아오지.”

“엇, 제가…….”

이미 무헌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 문제가 생겼다. 무헌이 냉기로 식혀 주던 화인의 열기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화인은 침착하게 눈을 감고 무헌이 흘려주었던 냉기의 흐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흐름을 따라 열기를 고르게 퍼뜨렸다. 처음이니 당연히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영체의 외피를 따라 영기의 흐름이 생겼다. 그 덕에 뱃속에는 계속 열이 들끓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머지않아 무헌이 돌아왔다.

“저, 또 열이 나는데요.”

화인이 미리 제 상태를 알렸다.

“불 속성이 발현 중이라 그렇다. 한 번 폭발을 시키는 게 낫겠군.”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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