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사 염화인 12

by 아무



“폭, 발, 이라니요?”

“이미 경험한 일이다. 흙 속성이 발현됐을 때, 바로 정화의 힘을 사용했다고 들었다. 그 덕에 발현 징후가 나타난 것도 모르고 지났을 테지.”

화인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나무, 불, 흙, 쇠, 물.

각 속성마다 일시적 발현 징후가 있다. 나무는 키가 자라고, 불은 열기가 끓고, 흙은 외형이 변하고, 쇠는 외피가 단단해지고, 물은 냉기가 감돈다.

그러나 보통은 다섯 속성이 동시에 발현되기 때문에 각 징후가 상충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드물게 각 속성이 순차적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각 징후를 차례로 다 겪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화인처럼.

“발현 징후가 일시적 증상이긴 하지만 빠르게 해소하려면 그 속성의 영력을 한 번 폭발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무헌이 평연히 덧붙였다.

“이왕이면 그 영력으로 저 노친네와 겨루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네에?”

화인이 기겁했다.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지만 독안을 이리 얕보는 걸 보면 저 노친네는 하급 고혼일 게 뻔하다.”

이어지는 무헌의 말에도 화인은 입만 벙긋거렸다.

“잠깐, 잠깐.”

그때 독안이 끼어들었다.

“크흠, 지금은 이쪽이 더 급하네. 서둘러 주술을 파훼하고 영입(靈入)해야 해. 더 지체했다가 박일태의 육신에 사후 변화라도 일어나면 어찌하는가.”

“그렇군.”

딱.

무헌이 손을 튕겼다. 그러자 화인의 옷이 무복으로 바뀌었다.

붉은 치마저고리에 하얀 장삼을 입고 홍대를 두른 화인.

이 모습을 본 서도의 얼굴에는 일순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를 알리 없는 화인은 서도 옆을 지나 박일태의 영 앞으로 가 섰다.

혼에 새겨진 이름이 바뀐 탓인지 그의 얼굴에 최만식의 이목구비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한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화인이 박일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헌에게 물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떠오를 것이다.”

화인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감각을 귀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검은 시야 속에서 까마득한 적막만이 화인을 감싸고 맴돌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독안의 초조함이 극에 달하고 화인의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올 때쯤이었다.

화인의 감은 눈꺼풀 속에 다시 환시가 떠올랐다.

하얀 무복을 입은 무당이 주술을 행하는 장면.

그 장면이 마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처럼 아주 선명하고 생생하게 펼쳐졌다.

희고 긴 천으로 피주술자를 쓸어내리며 입을 웅얼거리는 무당.

무당이 외는 주문 소리가 아주 먼 데서 들리듯 아득하게 울렸다.

여러 번 거듭된 주문 소리가 차츰 거리를 좁히더니 나중에는 귓전을 때릴 만큼 바짝 다가와 울렸다.

시작과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생한 환시와 쨍쨍한 환청.

화인은 그만 그것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탓에 화인의 영체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

놀란 독안과 무헌이 휘청이는 화인을 붙잡기 위해 팔을 뻗은 순간, 화인이 눈을 번쩍 떴다.

서도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독안 뒤에 숨었다.

눈이 큰 탓에 시원하게 보이는 회갈색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화인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세를 고쳐 섰다.

그런 다음 차사 셋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박일태와 최만식의 영 뒤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긴 화인은 흰 천 대신 넓은 장삼의 소매로 박일태와 최만식을 번갈아가며 머리부터 쓸어내렸다.

그 행위가 늘 하는 동작인 양 몹시 자연스러웠다.

“영에 묶인 비틀린 이름은 매듭을 풀고 마땅히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영은 진명을 되찾고 허망한 술법은 영에게서 물러나리라.”

화인은 이 주문을 세 번 외는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 박일태와 최만식의 영을 소매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두 영 앞으로 자리를 옮겨 네 번째 주문을 외웠다.

“영에 묶인 비틀린 이름은 매듭을 풀고 마땅히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영이 진명을 되찾고 허망한 술법은 영에게서 물러나리라.”

그때였다.

화인의 영체에서 노란 정화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 다섯 번째 주문을 외자, 화인의 등 뒤로 정화의 만다라가 피어났다.

화인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주문에 맞춰 느리게 회전하는 만다라.

만다라는 한 바퀴를 돌고 회전을 멈추었다.

이어 화인의 광배처럼 빛나던 만다라가 박일태와 최만식을 향해 강한 빛을 내뿜었다.

그 탓에 두 영은 만다라의 빛에 갇혀 동상처럼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화인은 주문을 멈추지 않았고, 만다라는 주문에 맞춰 다시 반대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느리게 역회전하는 만다라.

만다라가 두 영을 가두었던 빛을 도로 거두어들였다.

화인이 아홉 번째로 주문을 외웠을 때, 만다라는 모든 빛을 작은 점으로 응축시켰고, 열 번째로 주문을 외웠을 때, 만다라는 빛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다라가 완전히 소멸된 그 순간, 화인의 영체가 다시 한번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

이번에는 무헌이 화인의 영체를 붙잡았다.

무헌은 멍한 표정으로 힘없이 휘청이는 화인을 바로 세우고 곧장 눈을 확인했다. 다행히 눈동자의 색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무헌이 독안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하다는 신호였다.

그럼 이제 이쪽을 확인할 차례다.

독안이 얼빠진 두 영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신사년 사 월 이십팔 일 박일태!”

영력이 실린 독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 목소리에 피부가 희고 마른 진짜 박일태의 영이 반응하여 눈을 또렷하게 떴다. 또 그의 영체에서 옅은 빛이 피어올랐다.

“음.”

독안이 만족스럽게 목을 울렸다.

독안의 호명 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은 박일태만이 아니었다.

화인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어떻게 됐죠?”

“쉿.”

무헌이 제 입술 앞에 검지를 갖다 댔다.

“계사년 사 월 이십팔 일 최만식!”

이번에는 독안이 최만식을 호명했다. 그러자 머리가 희고 배가 나온 진짜 최만식의 눈빛이 또렷해지고 영체가 옅은 빛을 발했다.

그 모습을 본 화인이 화색을 띠며 물었다.

“주술이 파훼된 거죠?”

무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자, 이제 영입하세.”

두 영이 이름을 되찾아 마음이 가벼워진 만큼 독안의 말투도 한층 가벼워졌다.

“선율, 길을 열어라.”

무헌이 선율을 향해 지시를 내리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율의 영체에서 새하얀 영기가 발산되었다. 보기만 해도 정화가 될 것 같은 선한 기였다.

박일태의 육신 절반을 가리고 있던 검붉은 영기가 차츰 하얀 영기에 밀려난다.

머지않아 박일태의 육신이 검붉은 영기에서 모두 벗어나자 하얀 영기가 확산을 멈추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선율이 돌아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고맙네.”

독안이 작게 미소 지으며 제물상을 발로 밀어 옆으로 치웠다.

“육신 위에 그대로 누워 보시오.”

독안의 말에 박일태가 자신의 육신으로 걸어가 그 위에 누웠다.

독안도 박일태의 머리맡으로 한 걸음 다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독안 뒤에 숨어 있던 서도가 혼자 덩그러니 남고 말았다.

“이리 와, 서도야.”

풀 죽은 얼굴로 흘끗 대는 서도에게 화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서서 주뼛거리기만 하고 다가오질 않는다. 어쩐지 화인을 꺼리는 모양새였다.

아! 발현 징후 때문인가?

“지금은 태 수석님이 열을 식혀 주고 있어서 괜찮아.”

화인이 달래듯 말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다가오지 않았다.

‘열기 때문에 망설이는 게 아닌가?’

화인이 고개를 갸웃하고 서도를 살폈다.

그때 서도가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 옷 싫어.”

“이 옷이 싫어?”

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오늘 유난히 기가 죽어 있었던 서도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서도는 무당이 무서운 것이다.

“저길 봐라.”

갑자기 무헌이 끼어들었다.

선율과 여인 사이에 끼어 겁에 질린 무당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무당이라고 해 봤자 한낱 인간일 뿐이다.”

서도가 침을 꿀꺽 삼키고 처음으로 무당을 직시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 동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여긴, 기능성 근무복을 입은 염 차사일뿐이고.”

서도가 무헌의 말에 따라 화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화인을 바라보는 두 눈에서 서서히 두려움이 사라졌다.

“게다가 저 무당은 네 적수가 못 된다. 저 노친네도 마찬가지다.”

무헌이 턱짓으로 여인을 가리켰다.

“오오!”

화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되게 반응했다.

여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선임 차사 서도 역시 만만치 않은 영력을 지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또 무헌이 아이를 달래기 위해 거짓을 말할 만큼 다정한 성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서도 역시 화인과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그제야 잔뜩 굳었던 표정을 풀고 화인의 곁으로 다가와 살포시 손을 잡았다.

그 사이 독안은 선율의 호위를 받으며 영입을 시도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한들 이런 말도 안 되는 거래를 믿으면 어떡하오. 자포자기의 심정을 내 모르지 않소. 하지만 당신 가족을 위해서 라도 잘 살아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잘 돌보면서 살아야지, 이 사람아.”

독안이 안타까운 눈으로 박일태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옛날 사람이라 이런 말 밖에 못하는 걸 이해해 주시오. 그럼 남은 생은 현혹되지 말고 잘 살아 보시게.”

독안을 올려다보는 박일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마움의 눈물인지, 안도의 눈물인지, 그것은 박일태만이 알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

울먹이는 박일태의 인사를 끝으로 독안이 주문을 외웠다.

“신사년 사 월 이십팔 일 박일태의 영은 명부의 날까지 육신에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박일태의 육신에서 옅은 빛이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영이 무사히 육신에 안착한 것이다.

박일태는 정말로 죽다 살아났다.

때문에 영입이 되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지 누운 채로 눈을 몇 번 깜박이고, 팔을 들어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육신의 무게가 생을 실감케 했으리라.

박일태는 무거운 상체를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그의 눈에는 차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일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허공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어 방 한가운데에 엎드린 무당을 일별하고 진저리 치며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창 너머로 대문을 빠져나가는 박일태의 모습이 보였다.

이를 확인한 독안이 곧장 장막을 한 겹 더 드리웠다.

이제 최만식의 저택은 세상과 단절되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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