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됐나?”
무헌이 선율에게 뒤로 빠지라는 듯 고갯짓했다.
“정말로 제가 하나요?”
화인이 굳은 표정으로 무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이제 막 발현했을 뿐인데요. 게다가 영력 제어도 불안정하고…….”
앞선 주술 파훼 때와는 달리 영 자신감 없어 보이는 화인의 모습에 무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발현 상태지만 훈련은 했다고 들었다.”
“네에.”
“영력 제어를 체득하는 데에 실전만큼 좋은 게 없지. 마침 딱 알맞은 상대가 눈앞에 있으니 아주 좋은 기회다.”
화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있는 힘껏 영력을 폭발시켜라. 그 뒤로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하고 싶은 대로,라고 하시면…….”
“뭐든. 지금까지 배운 모든 걸 직접 체험해 보라는 뜻이다.”
무헌이 상체를 살짝 굽혀 화인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단, 사멸은 피하도록.”
화인은 마른침을 삼키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긴장으로 굳은 얼굴에는 다시금 불안이 떠올랐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영력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몸싸움이 될 확률이 높다.
수습 기간 동안 체술을 익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이승에서라도 치고받고 싸운 실전 경험이 있었더라면 사정이 조금 나았을까.
화인은 생각할수록 불안이 엄습해 왔다.
그런 화인의 표정을 보고 무헌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후방에 상급 차사를 넷이나 거느리는 호사를 누리면서 뭘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지?”
“걱정 말게. 여차하면 우리가 나설 것이니.”
독안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
그 순간 화인은 깨달았다.
‘그렇지, 여기선 모든 걸 나 혼자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런데 무헌도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하, 독안이 미덥지 못한 모양이군. 서도 같은 아이들에게 물러서 그렇지, 저래뵈도 수석이다.”
“응? 나 말인가?”
독안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래, 자네는 덩치에 맞지 않게 너무 감상적이야.”
“뭣! 자네가 너무 매정한 걸세.”
갑자기 두 수석 차사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매정이라니, 합리적인 거지.”
“나도 감상적인 게 아니라 이상적인 거네.”
이런 일에 익숙한 서도와 선율은 둘의 대화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 매번 이리저리 휘둘리지. 이상이 왜 이상이라고 생각하나.”
“그러는 자네야 말로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 주범이나 다름없네.”
그들의 유치한 말싸움에 당황한 이는 화인뿐이었다.
“저, 저기.”
화인이 중간에 끼여 이쪽저쪽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는 사이 화인의 긴장감이 약간 풀어졌다.
“후우.”
화인이 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래, 해 보자. 할 수 있어.’
이어 서도의 두 손을 꼭 잡고 각오를 다졌다.
“아자!”
기합과 함께 화인이 선율의 곁으로 가 섰다.
그때, 화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서려던 선율이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바닥에 납작 엎드린 무당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거기 계셨군요.”
선율의 미소로 보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잠시 뒤로 피하는 게 좋겠어요.”
이제껏 조상신과 저승 차사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만 있던 무당이 반색하며 얼른 뒤로 도망쳤다.
그런데 서로 이해한 바가 달랐던 모양이다.
무당이 방문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쾅!!
박일태가 나가면서 열어젖힌 방문이 저절로 거세게 닫혔다.
무당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 놀란 탓이다.
주저앉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무당, 그녀를 둘러싸고 반짝이는 옅은 빛.
선율이 무당을 가두기 위해 장막을 둘렀다.
“방 밖으로 나가는 건 반칙이에요.”
선율이 환하게 웃었다.
망연자실한 무당은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당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영력이 인간의 육신에 직접 상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영은 타격을 입는다.
그러니 무당이 양쪽의 공격에 계속 노출이 됐다가는 자칫 영의 사멸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더구나 조상신이라는 여인은 제 후손인 무당을 보호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만약 있었다면 무당을 사이에 두고 이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제 방해물을 치웠으니 맘 편히 겨뤄 봐요.”
선율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화인에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방 안에 퍼져 있던 자신의 영기를 슬그머니 거두어들였다.
“사자들아, 나를 얕보는 게냐!”
여인이 자신과 마주 선 화인을 발견하고 노하여 소리쳤다.
“그럴 리가.”
무헌이 점잖게 답했다.
“우리는 당신 수준에 딱 맞는 상대를 골라 내보냈을 뿐이다.”
무헌이 화인에게 흘려보내던 냉기를 거두고 여인의 자존심을 긁었다.
그 사이 화인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기가 영체 밖으로 새지 않게 꾹꾹 눌러 둥글렸다.
“무어라!”
여인의 등 뒤에서 단도가 빗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 단도를 막아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화인의 눈앞까지 날아온 단도.
화인은 그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애송이 주제에 겁도 없구나.”
단도가 화인의 영체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콰앙!!
뜨거운 열기가 폭발했다.
화인이 꾹꾹 눌러 모은 영력을 일시에 방출한 것이다.
눈앞까지 날아온 단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유리창은 깨지고 방문도 날아갔다. 거하게 차려둔 제물상도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또 화인의 붉은 영기가 여인의 검붉은 영기를 모조리 잡아먹어 방 안은 화염처럼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아수라장이 된 방 곳곳에 작은 불꽃이 튀기도 했는데, 그것은 무헌이 슬쩍 진화해 주었다.
그리고 이중으로 둘러진 장막 탓에 도망가지 못한 여인은 폭발 직후 가까스로 보호막을 펼쳐 영체를 보존했다.
폭풍이 가라앉고, 여인은 화인을 바라보며 얼이 빠진 채로 웅얼거렸다.
“……월영?”
무복을 입은 화인이 순간 그녀의 눈에 ‘만신’이 현현한 듯 보인 것이다.
“만신의 후손이냐?”
“만신?”
영기의 흐름이 눈에 띄게 안정된 화인이 주변을 둘러본 뒤,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만신 월영의 후손이냐, 이 말이다.”
“만신이면 무당이잖아요?”
화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걸요?”
“그런데 어째서 월영의 얼굴이 보이는 게냐.”
화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대화하는 동안 여인이 다시 검붉은 영기를 내뿜으며 화인 앞으로 다가와 섰다.
화인도 붉은 영기를 발산해 자신의 영체를 감쌌다. 여인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손에는 몰래 단도를 만들어 쥐었다. 처음 하는 형상화지만 제법 단도 같은 모양새였다.
그런데 마주 선 여인은 화인을 빤히 보기만 할 뿐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볼 수록 닮았구나.”
한참 동안이나 화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고작 저것이었다.
“만신인지 걸신인지, 나는 모른다고요.”
화인이 도발했다.
한 번쯤 이런 걸 해보고 싶었다. 이승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다. 싸움이 날 게 분명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싸워야 한다.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이다.
이제 처음의 긴장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말하는 꼬락서니까지 월영과 아주 꼭 닮았구나. 큭큭.”
여인이 음산하게 웃었다.
화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단도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나와 함께 중음으로 가지 않을 테냐.”
저승에 가지 못한 고혼들이 떠도는 세계.
일순 화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꿍꿍이속이기에 저와 함께 가자고 하는 것일까.
무헌은 여인을 보고 고혼 중에서도 하급 고혼이라고 했다. 이런 하급 고혼이 내뿜는 영기조차 이토록 악한 기운이라면 저 제안은 분명 선의가 아닐 것이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말없이 눈을 맞추고 선 화인의 마음이 제게 기울었다 여긴 것인지 여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중음으로 가면 지금보다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마.”
화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큰 힘이라고요?”
“그래.”
“얼마나 큰 힘을 얻을 수 있죠?”
“글쎄, 네가 하기 나름이겠지.”
“이승이나, 저승이나, 중음이나, 다 제가 하기 나름이네요.”
화인이 어깨를 으쓱하고 손에 쥔 단도를 여인의 턱 밑에 가져다 대었다.
살아 있었다면 노인 공경에 위배되는 행동이었겠지.
하지만 저 여인은 그저 악한 기운을 내뿜으며 중음을 떠도는 나쁜 고혼일 뿐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다시 물을 게요. 중음에서 큰 힘을 얻는다는 게 무슨 뜻이죠?”
양계(陽界)인 이승도, 음계(陰界)인 저승도 아닌, 공허한 중음에 무엇이 있기에.
화인의 눈이 이채로 반짝였다.
“큭, 순순히 따라오지 않겠다, 이 말인가?”
여인의 등 뒤에서 검붉은 영기가 솟구치더니 화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화인도 영기를 발산해 쏟아지는 상대의 영기를 밀어냈다.
서로 비슷한 힘이 부딪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영기가 상쇄되고 말았다.
“제법이구나.”
여인은 어느새 화인과 거리를 벌리고 섰다. 그리고 곧바로 화살을 날렸다.
화인은 단도를 늘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냈다.
“그 이상일 걸요?”
이번에는 화인이 여인을 모방해 화살을 만들어 쏘았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화살에 화염도 휘감아 날렸다.
화염을 휘감은 화살은 기세 좋게 날아갔으나 아쉽게도 여인의 끈적한 영기에 모두 막혀 연기로 화했다.
다만 화인의 기세에 밀린 여인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화인이 한 발 다가섰다.
그러자 여인이 한 발 더 물러났다.
다시 한 발 다가서니 또 한 발 물러났다.
“근접전에 약한가 봐요.”
화인은 붉게 타오르는 영기를 발산하며 여인에게 접근했다.
그러자 검붉은 화살과 단도가 화인을 향해 마구잡이로 날아왔다.
화인은 그것들을 가볍게 막아냈다. 뜨거운 영기로 태워버린 것이다.
“어때요, 그 이상이죠?”
화인이 여인을 벽으로 몰아붙이며 물었다.
그 순간 여인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고 화인을 사납게 노려 보았다.
눈이 사나워진 걸 보니 이제 더 이상 화인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모양이다.
“하급이라더니 정말 별 거 아니네요.”
화인은 영기를 풍선처럼 부풀려 여인의 영체를 압박했다.
아무래도 상대의 영체를 직접 손상시키는 것은 조금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압박에 괴로워하는 여인의 얼굴을 코 앞에 두고 화인이 씨익 웃었다.
“수석님!”
무헌을 부르는 순간.
푸욱!!
화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염 차사!!”
상급 차사들이 제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