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 깜박.
화인이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뜬다.
그리고 느리게 고개를 숙여 제 배를 확인했다.
배에 커다라 구멍이 뚫렸다.
여인의 손이 통과한 흔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배에 난 구멍은 아기 머리통만 한지 모를 일이다.
피는 나지 않았다. 인간의 육신이 아니니.
다만 별안간 갈 곳을 잃은 영기가 뻥 뚫린 구멍 속으로 아지랑이를 피웠다.
이윽고 여인의 검붉은 악기(惡氣)가 화인의 배에 난 구멍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인이 오염원이 주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제어되기 시작한 영기가 배에 구멍이 뚫려 뒤죽박죽 엉켜 버렸다.
그런데 거기에 악기가 침투하여 들쭉날쭉한 영기를 타고 흘렀으니.
끈적한 악기가 배에 난 구멍에 들러붙어 세를 뻗어 나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큭큭, 방심한 게지.”
여인이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화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큭큭, 큭큭, 큭큭, 큭큭, ……, 큭큭.
화인의 시야가 차츰 흐려졌다. 이내 눈앞에 완전한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 순간, 뜨겁게 타오르던 화인의 영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서도야!”
독안이 태세를 갖추며 황급히 불렀다.
그의 부름에 놀라 얼이 빠져 있던 서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었다.
“잠깐.”
서도가 원거리 정화를 시도하려는데 무헌이 제지했다.
서둘러 정화하지 않으면 화인의 영체가 전부 오염될 위기에 처했는데 말이다.
이는 악업으로 영체에 탁기가 쌓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악기에 오염된 영현은 중음을 떠도는 악령이 되고 만다.
한데 무헌은 어째서 서도를 막은 걸까.
무헌이 화인을 향해 턱짓했다.
서도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다시 화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때, 화인의 영체에서 노란빛이 피어올랐다. 스스로 정화를 시작한 것이다.
영기의 흐름을 타고 온몸으로 쭉쭉 뻗어 나가던 검붉은 악기가 다시 배에 난 구멍으로 모여들었다.
아기 머리통만 한 구멍에 도로 모여 엉겨 붙은 악기.
화인의 영체가 정화될수록 서서히 구멍도 줄어들고 악기도 오그라들었다.
머지않아 그 크기가 주먹만큼 작아졌고, 이내 손톱만 해졌다.
마침내 정화가 끝났다.
원래대로 돌아온 화인의 배에서 검붉은 구슬이 떨어져 나왔다.
그 구슬이 눈앞의 허공에 떠올랐다.
화인은 그것을 손에 꼭 쥐었다.
“고마워요. 내 마지막 양심을 날려줘서.”
그 순간, 화인의 영체가 발하던 정화의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푸른 냉기가 차 올랐다.
방 안이 삽시에 얼어붙었다.
영체를 파고드는 냉기를 느끼며 화인은 여인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나 영체 속으로 스민 냉기만큼이나 화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팍!
화인이 순식간에 한쪽 팔을 뻗어 여인의 목을 잡아챘다.
이어 물 속성 발현 징후, 냉기를 이용한 빙결로 여인의 팔과 다리를 결박했다.
“크흑.”
여인은 결박을 깨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실패했다.
“중음에서 큰 힘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요?”
화인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으며 열기를 꾹꾹 눌러 모았듯이 냉기도 차곡차곡 쌓았다.
“알고 싶으면, 직접, 가 보면 될, 것 아니냐!”
“마지막 기회예요.”
“무어라?”
여인은 불리한 상황임에도 굴하지 않고 소리쳤다.
“이게, 부탁하는 놈의, 태도냐!”
“부탁? 아닌데.”
화인이 손에 영력을 더했다.
“이거, 큭, 놔라! 건방진, 애송이.”
여인은 끝까지 바락바락 악을 썼다.
“크흑. 내가, 곱게 말해 줄, 성싶으냐!”
푸욱.
화인이 구슬 쥔 손을 여인의 배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여인의 뱃속에 구슬을 두고 손만 빼내었다.
“크헉!!”
“어때요? 배가 뚫린 기분이?”
화인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반 만 뚫려서 잘 안 느껴지려나?”
화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두 걸음 물러섰다.
이어 구슬을 쥐었던 손을 여인의 얼굴 앞에 쫙 펼쳐 보였다.
“진짜 마지막으로 물을 게요. 최만식이 오늘 죽는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여인이 입을 꾹 다물고 치욕스럽다는 듯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뒤에서 무헌의 지시가 날아왔다.
“사멸해도 좋다.”
무헌은 여인의 반응을 보고 얻을 정보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화인은 손가락 사이로 여인과 눈을 맞추었다.
그제야 여인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영기를 모두 빼앗아라.”
무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인이 손을 오므렸다.
팟!
여인의 뱃속에 심어 두었던 구슬이 깨졌다.
콰직, 콰지직!
이어 깨진 구슬에서 검붉은 악기를 품은 가시 모양 빙결이 팔방으로 뻗어 나왔다.
화인이 새로이 발현한 물속성 영력을 응축하여 구슬에 덧씌운 것이다.
이틀 차 차사가 하기에는, 더구나 수습 기간 동안 미발현 상태로 훈련한 차사가 하기에는 꽤 까다로운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화인은 제법 능숙하게 영력을 사용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운용이었다.
갑자기 증폭된 화인의 영력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여인.
그럼에도 화인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공격은 제대로 통했지만 바로 직전에 한눈팔다 당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화인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가시 빙결에 붙박여 꼼짝도 못 하는 여인의 모습을 제 눈으로 확인했다.
그런 다음, 여인을 영원한 죽음, 사멸로 이끌었다.
영체의 근원이자 원동력인 영기를 뽑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인의 영체에서 빠져나온 검붉은 영기가 화인의 손바닥 위에서 회오리쳤다.
“큭큭, … 내가 너를 얕보았구나.”
여인은 착잡한 눈으로 화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나, 그 힘으론, 어림도 없다.”
영기를 빼앗겨 스러지면서도 여인은 끝까지 거드름을 피웠다.
“……만신의 후손이여.”
쉰 목소리로 여인이 화인을 불렀다.
“하아, 아직도 그 만신 타령인가.”
화인의 목소리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두 번의 발현으로 영력이 대폭 상승했지만, 또 그만큼 소진한 상태였다.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그러니 지칠 수밖에.
화인은 지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여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핏줄의 업을 씻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끝으로 여인의 영체는 완전히 스러졌다.
모든 영기를 빼앗기고 사멸된 것이다.
‘핏줄의 업?’
여인이 사라진 벽을 바라보며 화인은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화를 면치 못한다, 라…….’
화인은 이내 손바닥 위에 남은 알사탕만 한 검붉은 구슬로 시선을 옮겼다.
‘만신 월영이 대체 누구이기에.’
그때 화인 곁으로 다가온 무헌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화인도 아무 말없이 무헌에게 구슬을 건넸다.
무헌은 다시 그 구슬을 선율에게 넘겼다.
“부탁하지.”
선율이 받아 든 구슬을 망설임 없이 입에 넣고 삼켰다.
그리고 손으로 어떠한 인(印)을 만들고 곁에 선 차사들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입속말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선율의 영체에서 새하얀 빛이 폭발했다.
이내 사그라드는 빛 한가운데에 선 선율.
새하얀 빛은 선율의 명치 언저리로 응집되었다.
곧이어 선율은 삼켰던 구슬을 도로 입 밖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구슬은 들어갈 때와 달리 속이 투명하게 내비쳤다.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구슬은 유유히 허공을 유영하며 선율의 손 위에 안착했다.
그 광경이 무척이나도 아름다워 신성한 느낌마저 들었다.
화인은 그런 선율의 모습에 시선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화인의 모습을 본 무헌은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고.”
“별말씀을요.”
선율이 산뜻하게 대답하며 무헌에게 구슬을 가볍게 던졌다.
무헌 역시 이를 가볍게 받아 들고 화인을 향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악한 기운이라고 해도 그 또한 영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 네.”
화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영기는 영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걸, 고혼의 사멸로 뼈저리게 체감했을 테지.”
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혼의 영기를 빼앗아 만든 검붉은 구슬은 악기의 집결체였다. 그리고 이것은 선율이 그것을 정화한 것이고.”
이번에는 선율이 화인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로 보아도 알겠지.”
무헌이 친히 화인의 눈앞에 구슬을 들이밀었다.
“이제 이것은 순수한 영기가 응축된 구슬이다.”
“오오.”
화인이 감탄했다.
“악기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소중한 자원이 된다는 말이다.”
구슬이 다시 화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하급 고혼의 것이니 응급처치 정도 밖에는 안 되겠지만, 이것을 지니고 다녀라.”
“네에.”
화인이 엉성하게 대답했다. 무헌의 마지막 설명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쓰라는 거지?’
투명한 구슬을 내려다보며 화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 다음.”
무헌이 독안을 향해 물었다.
“무당에게 내리는 신벌은 어쩔 셈인가?”
“귀문을 닫는 게 어떤가.”
독안이 답하고 딱 붙어 선 서도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명부를 어지럽힌 자다. 그런 것치곤 처벌이 상당히 가벼운 것 같은데.”
“무당에게는 생업을 빼앗은 것이니 신벌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네. 나머지는 인간들이 알아서 벌할 일이지.”
무헌이 탐탁지 않은 듯이 혀를 차고 말했다.
“자네는 너무 물러서 탈이네. 서도가 뭘 보고 배우겠나.”
“인정사정없는 자네보다야 낫지, 뭘 그러나.”
독안이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 그걸로 충분한가?”
무헌이 다시 물어도 서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뭐.”
무헌이 어깨를 으쓱하고 무당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선율이 드리웠던 장막이 저절로 걷혀 사라졌다.
여전히 주저앉은 채 파랗게 질린 무당이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 무헌.
무헌의 손이 그대로 허공을 쓸어내렸다.
“염라의 이름으로 귀문을 봉하노라.”
무당의 눈이 사르르 감겼다. 마치 그의 손길이 닿은 듯이.
그리고 이내 무당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