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사 염화인 15

by 아무



“오늘 다들 고생 많았네.”

그렇지 않아도 목소리가 큰 독안이 소리 높여 화인을 불렀다.

“특히 염 차사!”

화인의 어깨가 저절로 움찔했다.

“오늘 염 차사가 없었다면 일이 복잡해졌을 걸세. 정말 잘했네, 정말 잘했어!”

독안이 호방하게 웃으며 화인을 칭찬하자 선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오늘의 주역은 단연 염 차사였어요.”

“아니, 그, 제가 뭘요. 큼.”

뒷머리를 긁는 화인의 두 볼이 조금 불그스름해졌다. 어쩐지 쑥스러운 듯 보였다.

타인에게 칭찬을 받아 본 것이 대체 언제였던가.

무척이나 생소한 기분에 화인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음, 그런데 영현은 굳이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된다고 배웠는데요.”

화인이 눈알을 굴리다 서도 앞에 놓인 초코맛 아이스크림에 눈을 고정하고 넌지시 화제를 돌렸다.

망자 최만식을 무사히 저승으로 인도한 다섯 차사.

잠행부 흑조 무헌과 선율, 그리고 화인, 회혼부 독안과 서도.

그들은 지금 한옥 찻집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둘러앉아 있다. 등용부의 책임 차사 유경이 화인에게 차사를 제안할 때 왔던 그 찻집이다.

“이건 보양식이네.”

독안이 커다란 맥주잔을 순식간에 비우고 대답했다. 이에 무헌이 덧붙였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이유는 영이 아닌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서지만, 영현이 음식을 섭취하는 이유는 순전히 영기 회복을 위한 보양이지.”

“휴식으로 회복이 되는데, 보양이 왜 필요하죠?”

화인이 의아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소모된 영기의 회복과 축적 시간을 단축하기 위함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은 없으니까.”

“크, 무헌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독안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무헌을 바라봤다.

“뭔가. 그 눈.”

“마르지 않는 샘물, 태무헌 수석 차사가 그런 말을 하기에.”

독안이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놀렸다.

“우와, 정말요?”

화인이 순수하게 놀라워하자 무헌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럴 리가.”

“그만큼 영기가 크다는 뜻이에요. 특급 중에서도 상급이고, ‘측정불가’라고 하니까.”

선율이 웃으며 대변했다.

그 사이 평정심을 되찾은 무헌은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이었다.

“큼, 차사는 여느 영현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영기를 가졌지만 그만큼 소모량도 많다.”

무헌의 설명에 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혼부만 하더라도 도주 방지 장막을 칠 때, 망자의 영을 육신에서 분리할 때,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할 때, 등등 소량이지만 지속적으로 영기를 소모한다. 정예 부대라는 잠행부는 오죽할까.

“그러니 소모량과 회복량의 간극을 줄이고 최대한 많은 영기를 축적하기 위해 틈틈이 보양하는 거다. 자칫 한계까지 소모하여 뜻하지 않게 영기가 고갈되면 자멸하고 마니까.”

“자, 자멸이요?”

화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 손으로 고혼을 사멸해 보았기에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뭐 영핵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자멸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자멸까지는 아니라도 위급해지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니 정화부에 실려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미리미리 보양해 두도록.”

정화부는 이승으로 치면 병원과 같은 곳인데, 무헌은 무엇이 그리 싫은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무헌의 설명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졌던 화인이 아직 뜨거운 커피잔을 톡톡 건드리며 이어서 질문했다.

고혼을 사멸한 뒤에도 줄곧 머릿속 한 구석에 남아 있던 궁금증이었다.

“그러면, 그 고혼이 말한 큰 힘을 얻는 방법이 뭘까요?”

분명 큰 힘을 얻게 해 준다고 했으니 영기를 회복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거야, 뻔하지.”

무헌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독안을 흘긋 보았다.

“그건 내가 알려주지.”

이번에는 독안이 나섰다.

“저승은 음계, 이승은 양계라 하지. 하나 음의 세계라고 해서 음기만 가득한 것이 아니고, 양의 세계라고 해서 양기만 가득한 것이 아니네. 저승은 음기가 1할만큼 우세하고, 이승은 양기가 1할만큼 우세하여 그리 부르는 것이지.”

독안이 새로 주문한 맥주의 반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만큼 조화가 중요하다 이 말이네. 음과 양이 조화로워야 세상의 질서와 균형이 무너지지 않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독안이 나지막이 화인을 불렀다.

“그런데 염 차사, 영기가 저절로 회복되는 이유가 뭔지 아나?”

화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수습 교육이 영 엉망이군.”

무헌이 작게 불만을 토해냈지만 독안은 개의치 않았다.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우리 주변에 고루 산재되어 있기 때문이네. 음기와 양기는 만물의 근원이거든. 영체는 그걸 흡수하여 영기를 회복하는 걸세. 저절로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니란 말이지.”

여기까지 설명한 독안이 커다란 맥주잔을 들어 보였다.

“자, 여기 이 맥주를 보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도 음기와 양기가 가득 차 있네. 이걸 마시면.”

독안이 남은 맥주를 순식간에 비웠다.

“크하, 맥주 한 잔만큼 영기가 회복된다네. 그러니까 영현에게는 모든 음식이 보양이지.”

입가의 거품을 닦으며 독안이 맥주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새로이 맥주가 차올랐다.

“하나, 영기가 저절로 회복되는 것은 이승과 저승에서만 가능한 일이네.”

화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츰 뚱해지는 표정은 여전히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이지.”

독안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거든.”

화인이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아무것도,라고 하시면?”

“말 그대로네. 정말 아무것도 없어. 이승에 있지만 이승이 아닌, 고혼만이 존재하는 공허한 세계네.”

“그럼 어떻게 영기를 회복하는 거죠?”

“중음에서 영기를 회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들이 차린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 것. 또 하나는 다른 고혼의 영기를 빼앗는 것.”

무헌이 설명했다.

“그런 데서 어떻게 큰 힘을……?”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생각해 보게. 아무것도 없고 고혼만 있네. 그렇다는 건?”

화인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대충 떠오르는 대로 답했다.

“고혼을 잡아먹는다?”

“흐음.”

독안이 목을 울리고 정정했다.

“정확히는 영핵을 빼앗는 거네.”

“영핵이요? 서로 사멸한다는 말씀인가요?”

독안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핵은 인간으로 치자면 심장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서로를 사멸하면서까지 힘을 얻으려는 이유가 뭘까.

무헌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다시 끼어들었다.

“회복은 단순히 본래 정해진 양만큼 영기를 되돌리지만 영핵을 빼앗아 흡수하면 최대한도가 커진다.”

와인잔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무헌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노친네는 제가 키울 수 있는 최대한도로 영기를 키웠더군.”

“아!”

그제야 이해한 화인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럼 이 구슬을 먹으면 저도 영기의 최대치가 더 커지는 건가요?”

주머니에 고이 넣어 두었던 구슬을 꺼내 보이자 선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이미 정화를 거친 거라, 일시적으로 영기를 보충해 줄 뿐이에요.”

“보조 배터리 같은 거군요.”

“맞아요.”

선율이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후 화인은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끄덕이길 반복했다.

“흠, 그렇군.”

지금까지 들은 설명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소화시키는 중이었다.

잠시 후.

“그나저나 단 걸 저렇게 많이 먹어도 되는 건가요?”

어느새 서도 앞에는 딸기 파르페가 놓여 있다.

“뭐 어떤가. 이가 썩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 일할 맛이 나지 않겠나.”

서도에게는 보양보다 보상의 의미가 더 깊은 모양이었다.

“딸기, 줄까?”

그때 서도가 큰 결심을 하고 화인에게 손잡이가 긴 파르페용 숟가락을 내밀었다.

숟가락 위에는 하얀 크림이 묻은 딸기가 예쁘게 얹혀 있었다.

“아니, 이 딸기는 서도가 먹어. 나는 이거 먹을게.”

화인이 제 앞에 놓인 약과와 아직도 뜨거운 커피를 가리켰다.

화인의 대답에 서도는 눈에 띄게 안심하며 딸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귀여웠다.

‘무복이 싫다고 했지. 왜 싫은지 지금 물어도 될까?’

화인이 그윽하게 서도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으아! 뜨거워.”

마신 커피의 절반은 삼키고 절반은 도로 내뿜고 말았다.

“크하하하! 괜찮은가?”

독안은 호탕하게 웃으며 추가로 주문한 차가운 맥주를, 맞은편에 앉은 선율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리고 무헌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커피를 마시기 좋게 식혀 주었다.

“서도의 이야기가 궁금한가 보군, 그래.”

선율이 건넨 손수건으로 붉어진 얼굴에 묻은 커피를 닦을 때, 독안이 슬쩍 운을 띄웠다.

순간 멈칫한 화인이 이내 민망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이름이 들리자 눈을 들어 주위를 살피는 서도.

그런 서도에게 독안이 부드럽게 물었다.

“어떠냐, 서도야. 염 차사에게 네 이야기를 들려줘도 되겠느냐?”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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