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6

by 아무





높이 자란 대나무의 잎이 해를 가리어 어쩐지 조금은 음습하고 서늘한 검은 대나무의 숲 한가운데에 생기를 잃고 낡은 기와집 한 채가 겨우 서 있다.

툭 치면 당장이라도 허물어져 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신은 전혀 개의치 않고 툇마루에 올랐다.

소녀는 괜스레 손으로 기둥을 한 번 쓰다듬고 고개를 들어 처마를 이쪽저쪽 살폈다.

장지문 앞에 선 신이 뒤돌아 소녀를 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이 문은 네가 열어야 해. “

소녀는 조금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 위에 올라 선 소녀는 양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잡아당겼다.

방 안을 본 소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긴 도서관인가요?“

“아니, 너의 서재이자 너만의 비밀 공간이 될 곳이지.“

“서재? 비밀 공간?”

소녀의 볼이 상기되었다.

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손을 뻗어 보였다.

방 안은 외견보다 적어도 열 배는 큰 듯 보였고, 고풍스러운 이국의 도서관처럼 고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 벽면은 온통 책으로 가득했고 한가운데에는 너른 책상이 놓여 있었다.

“굉장해요. 겉보기와 전혀 달라요. 이런 곳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신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소녀가 서재 안으로 편히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잡아 주었다.

목을 길게 빼고 머리만 넣어 한 번 더 방안을 살피고 다시 고개를 돌려 신을 올려다보았다.

“여길 어떻게 들어가죠? 발판도 계단도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 그렇지, 내가 설명을 빼먹었군. 네가 이 방의 주인이라면 길이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어.“

“주인이라면? 그럼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이 방의 주인은 네가 맞아. 내 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

“아니라면요?”

“아니라면……, 그래도 뭐 험한 일은 당하지 않으니 한 번 들어가 보지 그래.“

신이 얼렁뚱땅 대답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죠? 내 서재가 될 거라면서요. 내 비밀 공간이라면서요!”

“그럴 것으로 예상한다는 의미였어.”

소녀의 표정에서 신에 대한 신뢰가 조금 사라졌다.

“우리 공동체는 모든 일원이 각자 자기만의 서재를 가져. 너도 이제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니 서재를 찾아야해.“

서재 찾기 담당은 신과 담 두 사람뿐이었는데, 신은 말수가 적기도 하고 말주변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일만은 언제나 담에게 미루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담이 다른 일로 멀리 나가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신이 소녀의 서재 찾기 담당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서재를 찾아야 하는 이유나 서재를 어떻게 찾는지 같은 상세한 설명은 모두 건너뛰고, 되는 대로 뒤죽박죽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거치는 단계니까 속는 셈 치고 한 번 들어가 보는 게 어때?”

소녀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신은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덧붙였다.

“흠, 사가가 만들어 준 음식들 어땠어? 이든의 옷은?“

“둘 다 너무 훌륭했어요.”

소녀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일순 표정이 밝아졌다.

“사가와 이든이 처음부터 요리와 양장을 잘했을까? “

신의 말을 들은 소녀가 고개를 갸웃하고 대답했다.

“글쎄요. 그 정도 솜씨면 처음부터 잘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 처음엔……, 정말 엉망진창이었지.“

어쩐지 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가가 만들어준 첫 요리와 이든이 선물한 첫 외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들이 있기까지 두 사람은 자기만의 방에서 수많은 연구와 시행착오를 겪었어. 만약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어제의 넌 그들이 내어준 예쁜 옷과 맛있는 요리를 경험하지 못했을 거야.“

소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설명에 조금 수긍하는 듯했다.

“너에게 어떤 재주가 있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싶다면 서재가 도와줄 거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에는 비밀 공간도 되어주지.“

“비밀 공간이라기엔 이미 백귀님이 아시잖아요.”

“네가 이 방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못해.”

“좋아요. 그런데 여기가 제 서재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시는 거죠? 그것만 말해 주세요.“

여기까지 온 이상 신을 못 믿을 것도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만물은 고유한 기를 품고 있어. 물론 인간도. 네 숨겨진 기와 이 방의 기가 거의 흡사해. 그러니 이곳보다 네 서재에 어울리는 곳은 없다고 판단했어.“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되었는지 소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신을 올려다보았다.

“믿어볼게요.“

어렵게 수락을 얻은 신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선 최선을 다한 설득이었다.

“먼저 한 발만 내디뎌 봐.”

신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소녀는 내민 손을 살포시 잡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오른발을 문 안으로 내디뎠다.

분명 허공이어야 할 곳이 딱딱하게 밟혔다.

슬며시 한쪽 눈을 떠 발 밑을 보니 둥근 툇마루 같은 것에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말도 안 돼! 정말 길이 생겼어요! 백귀님의 말이 맞았어요. 단번에 찾다니 정말 대단해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신의 입꼬리가 은은하게 올라갔다.

신은 소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손을 놓고 신난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소녀는 들뜬 마음으로 난간을 잡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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