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 발레 이야기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이라는 작품을 영상으로 시청했다.
직접 무대에서 보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무용수들의 섬세한 표현과 몸짓이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몸으로 서사를 전달하는 발레의 형식은 새로운 시선으로 고전을 바라보게 했다.
내용적으로 보면, 지금 기준으로는 상당히 터무니없고,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용왕의 등장은 신화나 전설로 이해한다 해도, 딸이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설정은 효가 아니라 불효에 가깝다.
부처님과 스님이 공양미를 받아야 눈을 뜨게 해준다는 전개는 오히려 이해타산에 밝은 비즈니스적 종교인으로 그려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종교를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청전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은 누구일까.
나는 심봉사라고 생각한다.
심청을 낳자마자 죽은 어미는 고통도 책임도 면한 채 떠났고, 갓난아이였던 심청도 고통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고통을 오롯이 겪어야 하는 사람은, 아내 없이 아이를 키우며 가난 속에 살아야 하는 심봉사뿐이다.
그러나 게임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어려운 난이도를 부여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가장 고난도 도전을 주어졌기에, 그만큼 성장과 성취의 여지도 큰 것이다.
고생을 ‘불행’이 아니라 ‘도전’으로 본다면, 심봉사는 가장 많은 기회를 가진 인물일지도 모른다.
극 중 인신공양 장면은 구석기 신앙쯤에서나 어울릴 법한 설정이다.
정말 문명시대에 그런 행위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만일 천 년, 혹은 오백 년 전까지도 그랬다면, 인류는 정말 빠르게 진화해 온 것이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심청전은 터무니없는 고생 서사이자 패륜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러나 그 시대의 문맥으로 보면, 수용 가능한 이야기였기에 오랜 시간 회자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딸이기 때문에 희생되는 설정은 그 시대 여성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들이었더라면 그러한 선택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은 남성을 따르고, 일부종사해야 하며, 가문의 명예나 생계 앞에 자기결정권을 포기해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유교적 남성중심 문화가 서사에 깊게 배어 있다.
고등학교 때는 ‘아름다운 효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배웠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비판의 여지가 너무도 많은 이야기다.
스님과 부처는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어리석고 가난한 자를 꾀어 돈을 뜯는 기만적인 존재로 보인다.
게다가 실제로 공양미를 바쳤음에도 심봉사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그의 눈이 열린 것은 딸이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충격 때문이 아니었나?
효가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라, 놀라움이 그를 깨운 것이다.
아이돌의 춤보다 더 화려하고, 인간의 근육과 유연함이 만들어낸 고도의 표현이 감탄스러웠다.
발레리나는 극한의 직업일 것이다.
보는 것은 즐겁지만, 그 몸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과 훈련을 견뎌야 했을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 훈련이 거의 학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부상을 달고 살며, 오래 지속하기 힘든 직업.
나이 들어서는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지를 것이 자명하다.
발레는 일상적이지 않다. 그래서 더 눈부시다.
자연스럽지 않은 동작이 흐르는 듯 이어지고, 정지할 때는 힘과 정렬이 느껴진다.
자기 몸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예술적 시도가 느껴졌다.
좋아서 하지 않는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좋아서 시작해도 직업이 되면 반복과 고통의 연속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심이고, 운명일 것이다.
발레를 보는 오늘, 극의 서사보다도 인간의 몸이 표현해낸 움직임의 언어가 압권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말이 아닌 몸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나는, 감탄했다.
몸의 한계를 넘어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