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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Aug 23. 2024

게으른 여행자의 런던 여행기(10)

세인트폴 성당 앞에서. photo by 남편

다음 날은 오후에 출국해야 했으므로, 이 날이 공식 일정의 거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은 날들은 런던 도심을 더 즐기기로 했다. 첫 목적지는 세인트폴 대성당.


윌리엄 왕자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을 했다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 지금의 국왕 찰스 3세와 그의 전 부인이자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 스펜서가 결혼식을 올렸던 곳이 세인트폴 대성당이다. 이 곳은 그 웅장함과 화려함은 물론 런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유명하다.

세인트폴대성당에서 내려다 본 런던.photo by 남편

정말 대단한 전경이다. 계단이 500개가 넘는데다 돔을 따라 나 있는 계단을 따라 가야 해서 좁다. 그래서 나는 못갔다. 딸도 못갔다. 아빠와 아들만 올라갔다. 이래서 내가 게으른 여행자다. 사실 이 곳은 게을러서보다 고소공포증 문제가 크다. 손에서 땀이 줄줄 나고 다리가 풀리는데다 예민해져서 성질머리가 고약해진다. 그걸 아는 남편은 더 권하지 않고 모험을 좋아하는 아들과 함께 떠났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1층 바닥이 보인단다. 와우 photo by 남편

티켓 가격이 제법 되는데..4명이 10만원 정도(패밀리티켓 60파운드. 부모와 아이 2~3명까지 입장 가능). 두 명이라도 절경을 감상했으니 됐다고 생각한다. 나와 딸은 1층과 지하를 충분히 구경하기로 했다. 입장권에 오디오가이드가 포함돼 있는데 런던에서 몇 안되는 한국어 가이드가 있는 곳이어서 고마웠다. 1층에 의자를 많이 설치해둬서 앉아서 충분히 가이드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곳에는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 세균학자 플레밍 등이 안장돼 있다고 한다.


화려한 조각도, 안장돼있다던 유명인들도 신기했지만, 이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티켓 확인 업무를 하던 할머니였다. 런던 대부분의 관광지를 예약한 덕에 쉽게 입장이 가능했는데 이 성당에서만 유난히 입장이 오래걸렸다. 영국 대부분의 명소에서 가방 검사도 꼼꼼히 하고, 그래서 오래 걸리나 했는데 1층 실내에 들어와서 예약해 온 티켓을 보는 업무가 시간이 제법 걸리고 있었다. 나이가 70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 직원이 우리가 프린트해 온 종이를 받아 들고 정말 느린 영국식 영어로 "렛 미 씨...."라고 했다. "패밀리, 투 어덜트, 투 칠드런..." 이러면서 큐알코드밖에 없는 종이와 컴퓨터 화면을 뭔가 한참 보셨다. 아, 이래서 오래 걸렸나보네.


사실 할머니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건 여기가 처음은 아니었다. 런던에서 할머니들이 내 눈을 끄는 일은 여러번 있었는데, 여든 가까이 된 할머니가 자전거를 타시면서 감히 앞길을 막는다고 우리가 탄 우버 기사를 째려보던 장면, 멋진 원피스를 입고 꼿꼿하게 걷던 할머니, 명소 안에서도 두 분 정도가 함께 돌아다니며 봉사인지 일인지를 하시는 모습 등이었다. 왜 이렇게 할머니들이 기억날까. 우리나라에서는 할머니들이 일하시는, 특히 사무직으로 일하시는 장면이 몹시 낯설었던 것 같다. 많은 연세에 쉬시는 것도 좋지만, 관광객들의 즐거운 모습을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도 있을테니, 일하시는 모습도 좋아보였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보다는 유유자적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코스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한 내셔널 갤러리. 가는 길에 역시 해리포터와 웡카를 찍었다는 리든홀마켓에 들러 간식을 먹었다. 간단한 빵과 샌드위치와 늘 그렇듯 커피. 정오가 안 된 시간이었지만, 옆 펍에서는 아저씨들이 서서 맥주를 한 잔씩 즐기고 있었다. 남편은 "저 장면은 처음 봤을 때 참 이해가 안됐다"고 했다. 왜 돈내고 서서 먹냐는 말. 가끔은 문화라는게 참 이해하려면 어려울 때가 있다.

돈 내고 서서 술 마시는 영국 사람들. 그런데도 엄청 즐거워보인다. photo by 남편

살살 걷다보니 트라팔가 광장 뒤로 내셔널갤러리가 보인다. 런던의 명소들은 참 큼직큼직하다. 랜드마크랄게 너무 많으니 참 관광산업으로서는 더 큰 복이 없다.

내셔널갤러리에는 유명한 작품들이 많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은 물론, 모네의 수련도 있고, 얀반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도 있다. 정말 많은 대작들이 있고, 그 앞에는 관광객도 많다. 대작을 직접 본다는게 설렜는데 특히 모네의 수련이 사진으로 본 것과 느낌이 많이 달라서 인상적이었다. 최근 들어 그림을 보는 것을 예전보다 좋아하게 됐는데 국내에서도 많은 전시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셔널갤러리와 고흐의 해바라기 photo by 남편

아이들을 데리고 내셔널갤러리에서 나와 코벤트가든을 향해 걸었다. 출장길에 간 곳 중 옥스포드나 빅벤 같은 유명한 곳 외에는 많이 잊어버린 남편이 거의 유일하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이름 코벤트가든. 광장을 중심으로 수공예품이나 런던 여행 기념품들을 파는 가게가 많이 있다.


당이 떨어질 때쯤이라 파르페를 파는 아기자기한 식당에 들어가 간식을 먹고 나와서 기념품들을 구경하다 런던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진 후드 집업을 샀다. 18파운드니까 3만원이 좀 넘는 가격. 남편은 런던 와서 런던 써있는 기념품을 산다고 웃었지만, 나는 마음에 들었다.


이날은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었지만, 18000 걸음이나 걸은 우리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야경을 보며 밥을 먹는 것보다 숙소에서의 조촐한 저녁을 원했다. 결국 우리는 런던 야경을 보러 따로 나가지는 못했다. 이러니 내가 어찌 나를 게으른 여행자라고 하지 않겠나. 그래도 편의점 샐러드, 컵밥, 햄과 맥주 뿐인 저녁이었지만, 런던을 떠난다는 아쉬움 말고는 여행에 대한 만족감으로 너무나도 충만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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