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리피언 Jul 08. 2022

그날 워킹맘 김 모씨의 마음은 왜 그렇게 급했나

전업주부 슬리피언의 워킹맘이었던 이야기

"나 그때 너 좀 이상한 앤 줄 알았잖아."

1호기 친구 엄마 A언니가 말했다. 그럴만도 했다. 나도 내가 이상한 애 같았으니까.


큰애가 다섯 살 때였다. 집 앞 상가에 갈 일이 있어 나온 길에 아이가 나에게 속삭였다. "엄마, 쟤 우리반 애야." 오, 새 어린이집 친구는 처음 봤다. 5세반까지 있다던 이전 어린이집이 뜬금없이 반을 폐지하는 바람에 다사다난 끝에 입학한 새 어린이집에는 아직 '아는 친구 엄마'가 없었다.


그 엄마도 아이가 얘기를 했는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주고받으면서 아이 얘기를 들은 적 있다는 둥, 가까운데 사는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돼 좋다는 둥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집도 가까운 것 같으니 언제 한번 만나서 놀지 않겠냐고. 아주 순조로웠다.

워킹맘에 첫아이 엄마였던 나는 아이가 왕따를 당할거라는 공포심이 있었다. 픽사베이

집에 돌아왔는데 평소 조용한 아이가 난리가 났다. 그 친구 집에 오늘 놀러가면 안되겠냐고. 으응? 오늘 만나서 이제 막 인사 주고받았는데? 1호기야, 어른들의 세계에는 친해지는데 속도가 필요하단다. 니네와는 달라.

그런데 이날따라 애가 막무가내였다. 사실 "다음에"라고 말했지만, 그 다음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걸 얘가 알았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은 어린이집 끝나면 아는 애들끼리 삼삼오오 놀이터로 놀러가는데 우리 애만 아이 봐주시던 친척 분이 집으로 바로 들어왔던 것 같다. 아마 귀한 아이 다칠까봐 걱정하셔서 그런 것 같은데, 아이는 친구들과의 만남에 목이 말라 있었다.


나는 결국 미친 척하고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조금 아까 만났던 XX이 엄만데요. 아하하하하"

"아, 네 그런데 웬일로.."

"아니 저희 XX이가 아까 YY를 보고 와서는 친구랑 놀고 싶다고 난리가 나서요. 아하하하하.. 혹시 오늘 좀 놀 수 있을까요? 아하하하하"

수화기 너머로 '읭?'하는 그 엄마 표정이 눈에 보였다. 잠깐 마가 떴다. "아...하하..하 그런데 저희가 오늘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오늘은 안될 것 같아요..."

까였다. "아...하하.. 그렇죠. 너무 갑자기라.. 혹시나 해서 말씀드려봤어요. 그럼 조만간 한번 봬요~"라며 괜찮은 척, 아무일도 없는 척 전화를 마무리했다.

이상한 애 같았을 텐데도 A언니는 손을 내밀어줬다.

사실 아이의 닥달도 있었지만, 내가 마음이 급해서 전화를 한 것도 있었다. 첫 아이에 워킹맘이었던 나는 아이가 바쁜 나 때문에 친구를 잘 못사귀면 어쩌나 하는 공포가 있었다. 어린이집을 옮긴 지 두 달 정도 됐을 땐데 아파트 단지 안 어린이집이 아니어선지 아직 아이 친구들, 혹은 그 엄마들을 만나본 적이 없던 상태라, 내 안에서 조바심이 커지고 있었다. 그 조바심의 싹은 아마 아이 네 살때 만난 그 엄마 때문에 더 커졌던 것 같다.


아이가 네 살 때, 나는 당연히 다니던 곳을 계속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을 쯤 어린이집에서 5세반을 폐지한다고 했다. 아마 유치원으로 많이 가는 5세반보다 4세반을 한반 더 만드는게 이득인 모양이었다. 화들짝 놀란 몇 엄마들이 '비상대책회의'를 해야하니 만나자고 연락이 왔었다. 회사가 집이랑 가까웠던 터라 점심시간을 쪼개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 모임을 주도했던 B엄마가 초면의 나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워킹맘 아이는 왕따 당한다는데 왜 일하세요?"

거 참 필터가 없구랴. 그때까지만 해도 워킹맘이 키우는 아이에 대한 시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냥 회사 다니면서 아이볼 시간이 적은 것이 아쉽고, 체력적으로 힘이 들뿐, 다른 엄마들 사이에서 워킹맘의 아이들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관심도 없었고, 잘 몰랐다. 내가 아이를 기관에 보내면서 처음 직면한 타격감 있는 질문이었다.


무슨 의도지? 머리가 바빠졌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뜻으로 나한테 이렇게 묻는 걸까? 자기가 얼마나 무례하게 질문하는지 모르는걸까? 황당해서 빤히 쳐다봤는데 자신의 무례함을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니 진짜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때 너무 당황해서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성격 상 대강 웃으면서 뭐라고 둘러대고 다른 말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오빠, 워킹맘 애는 왕따 당한대"라고 쓰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남편의 표정도 웃겼던 기억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몇 번 더 만났는데 알고보니 사실은 B엄마 역시 일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몇 번 겪어보니 말에 필터가 없는 편이었는데, 그래서 질문도 저 모양으로 나온 것 같았다. 자기 남편은 500만원 이상 벌어올 거 아니면 절대 일하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나는 나가서 회식도 하고 싶고, 사람도 만나고 싶은데, 니가 집에 있는게 돈 아끼는 거라며 일을 못하게 한다"고 했다. 그 외에도 유치원 알아보다가 남편이 "너는 이런 가난한 동네에 애들하고 애를 섞이게 하고 싶냐"고 한다는 등의 얘기를 해서 내가 혀를 내둘렀다. 아이고, 이 양반, 집에서 속이 썩었겠구나.. 나중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B엄마는 자기 남편은 일을 저렇게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 그게 궁금했는데 말을 잘 못하는 거였다. 이후에 유치원이 달라져서 다시 만날 일이 없었는데 지금도 가끔 잘 지내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잘 지내요, B엄마?


그 통화의 주인공이던 A언니와는 결국 친해졌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게 좀 걸렸던지 언니가 먼저 집에 놀러올 수 있냐고 전화를 줘서 우리는 아름다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무슨 얘기 끝에 그 언니가 "야, 나 그때 너 좀 이상한 앤줄 알았어"라며 깔깔 웃었다. 나도 "나도 알아. 나도 내가 이상했는데"라며 같이 깔깔 웃었다.


지나고보니 워킹맘이든 전업맘이든 상관없이 친해질 사람은 어떻게든 친해진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인데, 그 당시 나는 그 시간에 자신감이 없다보니, 마음이 조급해지곤 했다. 굳이 이상한 사람들에게까지 굽히면서 친해질 필요는 없는 거였는데. 나중에 끊어내기가 더 힘들다.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하고, 엄마 도움 없이도 친구 정도는 사귀게 되고 보니, 참 "뭣이 중헌디" 싶은 옛이야기로만 남은 에피소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