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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글리스트 Mar 10. 2017

박근혜, '꽃길'로 왔다가 '흙길'로 간 65년

                                                                                                                                                                                                                 

제18대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됐다. 헌법과 법률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직 ‘탄핵’ 인용을 받은 것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대통령의 딸’ ‘독재자의 딸’ ‘부녀 대통령’ ‘선거의 여왕’ ‘불통의 대통령’ ‘수첩공주’ ‘레이저 눈빛’ 등 숱한 닉네임을 지녔던 그녀가 ‘꽃길’로 왔다가 ‘흙길’로 가게 됐다. 65년 인생을 정리했다.



박근혜는 1952년 2월2일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와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희는 전처소생의 장녀 박재옥이 있었다. 박근혜 밑으로는 여동생 박근령과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63년 아버지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에서 성장했다. 12세부터 부족함 없는 공주의 삶을 시작한 셈이다. 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 74년에 졸업한 이후 프랑스 그르노블대로 유학을 떠났다. 국민들은 인자한 이미지의 육영수 여사, ‘큰 영애’ 박근혜에 대한 사랑과 동경을 아끼지 않았다.


74년 8.15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의 총탄에 사망하자 귀국, 79년 10.26 사건 이전까지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하며 아버지의 공식 행사와 해외 순방 등을 수행했다. 75년부터는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에 참여, 이때 최태민이 그의 새마을 사업에 참여하며 인연을 맺게 됐다. 이렇듯 의전상의 영부인 권한대행 기간 동안 축적한 경험이 박근혜의 유일한 장점이자 주특기인 의전, 정치적 암수, 판세 읽기 및 돌파 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가 서거한 뒤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으며 80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82년 육영재단 이사장과 94년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하며 지냈다.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했고 89년 두 사람은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했다.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과거 박대통령을 떠받들던 이들의 배신, 아버지가 일군 ‘한강의 기적’이 ‘개발독재’ ‘인권탄압’ ‘비민주적 제왕’으로 비판받는 데 분노와 더불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이뤄야겠다는 사명감에 98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과 인연을 맺어 정계에 입문, 4.2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화려하게 ‘정치인 박근혜’로 복귀했다. 이후 승승장구했다. 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 총선에서 ‘차떼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 난파 직전이던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여의도 천막당사를 주도하며 121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에는 ‘면도칼 테러’를 당하며 고비를 겪었지만 그해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선거의 여왕’이란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2007년 한나라당 제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 근소한 표차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했다. 그럼에도 흰색 재킷 차림으로 연단에 선 그는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한나라당 내 비주류계를 이끌며 절치부심했다.



2011년 12월부터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 혁신 작업을 지휘했고 2012년 제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돼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득표율 48.0%보다 많은 과반수 득표로 당선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의 독신 대통령, 부녀 대통령 기록을 줄줄이 달았다.


2013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하며 33년 만에 영애가 아닌 대통령 신분으로 다시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치인 박근혜의 최대 자산이자 무기는 아버지였다. 중장년층 및 노년 세대에게는 여전히 ‘한국 근대화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이 연민과 애정으로 화학 작용했다. 또한 보수 진영 및 영남, 충청권의 지지를 얻는 아이콘적 정치인으로서 강점을 발휘했다.



취임 이후에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윤창중 대변인 주미한국대사관 인턴 성추문 사건을 시작으로 연이은 인사참사로 인해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는가 하면 북한과의 관계악화, 개성공단 철수, 청와대 문건(일명 정윤회 십상시 문건) 유출 파동,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사드배치 논란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 사건사고가 속출했다. 


이런 와중에도 국민, 국회, 언론과 소통을 거부하는 독단과 불통으로 국정지지도는 연일 하락곡선을 그었다.


지난해 10월 최태민의 딸이자 오랜 친분을 유지해온 최순실의 태블릿PC가 세상에 드러나며 '비선실세 국정농단' 게이트의 주인공이 됐고 2016년 12월3일 헌법과 법률 위반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회에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이 발의, 12월9일 국회에서 가결됨으로써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마침내 10일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박근혜 대통령)이 법치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국민의 신의를 부정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사진출처= 청와대

                                                                                                                                                                                                                 

에디터 용원중  goolis@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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