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좇아 연기하진 않는다"①
'써니'에서 본드에 취한 광기 어린 눈빛을 쏘며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한공주'로 각종 시상식을 휩쓸며 '써니'의 연기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이후 '뷰티 인사이드' '해어화' '곡성' 등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으며 연기파 배우로 성장했다. 강렬하고 무게 있는 연기로 대중에게 각인됐던 배우 천우희가 밝고 싱그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4월5일 개봉한 영화 '어느날'이다.
'어느날'은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의 영혼을 보게 된 남자와 뜻밖의 사고로 영혼이 돼 세상을 처음 보게 된 여자가 만나 교감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 3월31일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김남길과 함께 '어느날'의 주연을 맡은 천우희를 만났다. 호감형의 두 배우가 만났으니 당연히 로맨스를 기대한 관객도 있을 터였다.
"많은 분들이 멜로라고 생각하시더라. 그런데 저는 멜로 감성이나 러브라인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점이 좋았다.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완전 다른 톤의 영화가 됐을 거다. 이 작품에는 로맨스가 드러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천우희는 멜로 연기를 선보인 적이 거의 없다. 인기 없는 장르로 전락했기에 멜로를 지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에 "장르를 딱히 가리진 않는다"며 "난 하고 싶다"고 털털하게 웃었다.
"무명 시절에는 작품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서 할 수 없었다면, 요즘엔 괜찮은 멜로 시나리오가 드문 것 같다. 멜로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통속적인 것도 나름의 감동을 전할 때가 있다. '뭐야 뻔해'라고 하지만 눈물이 나기도 하고, '맞아 그렇지' 하며 공감하기도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상복이 있는 배우인 건 분명했다. 천우희는 지난 2014년 '한공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과 백상예술대상 여자 신인연기상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무려 12개나 수상하며 젊은 배우들 중 가장 크게 두각을 드러냈다.
"수상에 대한 욕심은 항상 있다. 인정받는 건 너무 뿌듯하니까. 하지만 그게 작품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 되진 않는다. 상을 따르다 보면 내가 정말 볼 수 있는 걸 못 볼 수도 있다. 부담도 있다. '다음에 또 어떤 걸 할까? 어떤 걸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면서 많이 생각하는데, 거기에 얽매이면 연기 생활을 오래 못할 것 같다."
시원한 눈매를 접으며 웃는 천우희는 누가 봐도 쾌활한 사람이다. 그동안 연기한 인물들의 무게와 분위기를 생각하면 얼핏 낯선 모습이기도 하다. '어느날'의 미소는 천우희의 발랄한 면모를 한껏 볼 수 있는 캐릭터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여태껏 찍은 포스터 중에서 유일하게 웃고 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가장 편안하게, 내 모습대로 했다. 내가 장난도 잘 치고 개구진 면이 좀 있다. 주변 사람들이 '너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왜 계속 어렵고 진지한 역만 골라서 하냐'고 그러더라. 사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조금 망설였다.
원래는 청순하고 아련한 캐릭터였다. 혹시나 식상하게 표현되진 않을까 걱정했다. 감독님, 남길 오빠랑 대화하면서 다르게 그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할 수 있는 한 발랄하고 친근하게 표현했다."
미소가 본인의 성격과 가깝긴 했지만 시각장애인과 1인 2역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번 연기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짐작이 든다. 천우희는 특히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 안의 편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송혜교 선배님이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할 때도 그런 얘기가 많았던 걸로 안다. 높은 굽을 신고 화장하는 것 등에서.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각장애인 분들을 처음 만났을 때 편견이 와장창 깨졌다. 난 스스로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런 건 못 할 거야, 이건 어려울 거야'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정말 무서웠다. 연기할 때도 세상을 본다는 걸 표현하는 게 참 어려웠다."
사진 지선미(라운드 테이블)
인턴 에디터 진선 sun27ds@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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