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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글리스트 Nov 01. 2017

[인터뷰] ‘유리정원’ 신수원 감독

 “늘 갈망한 판타지, 밀어붙였다”



10월을 뜨겁게 달군 부산국제영화제의 화려한 개막작 ‘유리정원’이 드디어 베일을 벗고 관객들을 마주했다. ‘마돈나’ ‘명왕성’ ‘순환선’ 등을 연출하며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신수원 감독이 나무가 되고 싶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순수와 신념, 공존의 가치를 전하며 다시 한번 기지를 발휘했다. BIFF에 초청된 적은 있어도 개막작은 태어나 처음이라 영광이라고 수줍게 미소 지은 신수원 감독을 26일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유리정원’은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던 과학도 재연(문근영)이 후배에게 연구 아이템과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후, 어릴적 살았던 숲 속의 유리정원 안으로 숨어 들어간 이야기를 그린다. 무명 작가 지훈(김태훈)은 재연이 이사 간 방에서 그녀의 비밀을 엿보게 되고, 유리정원까지 찾아가 재연의 일상을 소설로 담기 시작한다.     


        



Q. ‘유리정원’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소재를 다룬다. 흥미롭지만, 관객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스토리이기도 하다.


A. 원래 쓰는 건 판타지를 좋아했다. 처음 쓴 시나리오도 사실 판타지였고, 늘 갈망해온지라 영화를 찍을 때마다 조금씩 판타지 요소를 집어넣었다. 이번엔 뭔가 더 밀어붙이고 싶더라. ‘마돈나’ 시나리오를 쓸 때가 ‘유리정원’을 생각하게 된 시초 같다. 정확히는 뇌사에 빠진 미나라는 인물이 발단이었다. 뇌사와 관련된 리서치를 하다가, 외국에선 ‘코마’라고 하는 반면 우리나라에선 ‘식물인간’이라고 하는 게 재밌더라. 시나리오를 쓰다가 토템 신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마을에 있는 고목나무나 장승에 물 떠다놓고 기도하는 것들이 흥미로웠다.


Q. 영화에 등장하는 ‘녹혈구’가 흥미롭다. 영화를 위해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했을 듯하다.


A. 나무는 광합성을 하며 살지 않나. 물, 이산화탄소, 햇빛만 있으면 생명을 연장하는 걸 보며 인간이 광합성을 하면 어떨지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녹혈구라는 건 당연히 없지만, 인공혈액이란 건 존재하니까 시나리오 집필에 도움이 됐다. 리서치 하면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자문을 구한 교수님이 계셨는데, 솔직히 이건 말도 안 되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근데 교수님은 말도 안 될 수도 있지만 과학에 불가능이란 건 없다고 하더라. 과학자들은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고, 과학은 그 자체로 미지의 세계라면서. 그 말이 굉장히 긍지가 됐다. 과학도들이 영화를 보면 말도 안 된다고 할 순 있을지 몰라도, 영화라는 건 그냥 빠져들어서 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Q. 한 여인의 아픔을 내밀하게 다루는 동시에 판타지적인 연출도 일궈내야 했다. 가장 신경 쓰인 장면은 무엇인가.


A. 고목나무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제일 고생한 것 같다. 2미터 높이까지는 미술팀에서 가짜 모형을 만들고 그 위로는 CG로 구현해야 했다. 실제로 그걸 구현할만한 숲이 없었다. 숲 헌팅을 하다가 결국 가장 맘에 드는 곳을 찾았는데 하필 또 습지였다. 비가 오면 큰일 나니까, 촬영을 최소화했다. 그 곳에서는 촬영을 일주일간 했다. 매일 비가 안 오길 기도하면서. 숲도 세 군데나 이동해가면서 찍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배우들이 제일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Q. 마땅한 숲을 찾느라 꽤 고생한 듯 하다.


A. 이 영화는 특히나 공간이 가장 중요했다. 판타지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면 실패하는 거니까. 인물이 숲으로 들어갈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나. 그 안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게 가장 고민되는 지점이었다. 이질적이지 않으면서도, 판타스틱한 공간을 찾고 싶었는데 한국엔 그런 곳이 잘 없었다. 그 숲은, 누가 겨울에 동영상을 찍어왔는데 정말 좋더라. 이파리가 돋아날 때 다시 봐야 하니까 3월 말쯤 직접 가봤다. 가자마자 너무 좋아서, 그곳으로 바로 정했다. 물론 그 숲을 발견하기 이전에 강원도, 제주도 등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Q. 영화를 보다보면 관객조차도 ‘녹혈구’의 가치를 주장하는 재연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혼동하게 된다. 의도하고 연출했나.


A. 그렇다. 하지만 사이코패스 같은 느낌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재연이 그렇게 된다면, 결말에서 관객들이 재연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할 것 같더라. 신념이 흔들리면서 미쳐가는 건 표현해야 하고, 그게 너무 극적이길 바라는 건 아니어서 문근영 씨와 대화를 많이 나눴다. 광기 같은 걸 서서히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주문한대로 잘 표현해주더라.


Q. 재연에게 ‘기형적인 신체’라는 설정을 심은 이유가 궁금하다


A. 재연이 영화에서 그런다. 벌목꾼인 아버지가 나무를 쳐서 자기한테 재앙이 내려졌다고. 정교수는 말도 안 된다고 한다. ‘전설의 고향’이나 설화 같은 것만 봐도 나무를 의인화 시키지 않나. 그런 걸 좀 넣어보고 싶었다. 팩트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기형의 신체는 재연이 연구에 더 몰두하게 되는 그런 장치가 되기도 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게 작용했는데, 아무래도 다리를 표현하는 게 쉽지가 않더라. CG도 그렇고, 다리를 저는 장면도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Q. 재연은 오로지 문근영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 같을 정도로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감독은 어떤 점에서 문근영을 캐스팅해야겠다고 판단했나.


A. 눈빛이다. 후반부에는 대사도 없고, 표정과 눈빛으로만 모든 걸 표현해야 했다. 숲에서의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에도 클로즈업을 찍고 싶게 할 정도로 완벽하더라. 엄청난 흡입력이 있는 배우 같았다. 또 하나 중요한 건, 문근영 씨가 ‘유리정원’의 시나리오를 굉장히 좋아했다. 좋아해야 힘들어도 함께 갈 수 있는 거다. 소통을 할 때도 어렵지 않았다. 첫 테이크 이후 이야기를 나누면, 두 번째 테이크에서는 완전히 달라질 줄 아는 그런 배우다.


Q. 김태훈이 연기한 소설가 지훈은 어떤 의도로 창조한 인물인가.


A. 지훈은 이 영화에서 가장 보통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 정말 자신이 사람의 인생을 파괴할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일을 저지른다. 사실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악인은 아니다. 우리가 딜레마에 놓인 순간 어쩔 숭 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래서 또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마련이니까. 지훈은 딱 그런 인물이었다. 지훈을 연기한 김태훈 씨는 착해 보이기도 하면서 눈을 찌푸리면 다른 얼굴이 있고, 그런 게 재밌었다.


Q. 사람에 의해 마음이 난도질당한 여인이 주인공이다. ‘마돈나’에서도 그랬듯, 매 작품마다 극한의 사연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것 같다.


A. 모르겠다. 내가 마조히스트일지도(웃음). 어제 관객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어떤 여성분이 ‘너무 아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시더라. 나중에 그분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신은 울면서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고 했다. 이렇게 봐주시는 분도 있구나 싶어서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관객들을 힘들게 만들 순 있지만, 세상에 이런 사람들은 많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모르고 살 뿐. 재연도 난도질당한 인물이지만 결국 아름답고 편안한 모습으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거기로부터 비롯된 힐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Q.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유리정원으로 숨어버린 재연은 어느날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지훈을 극구 거부한다. 그러다가도 마음을 느슨하게 푸는 게 인상적이다.


A. 지훈이 손을 떨고, 얼굴이 굳어가는 걸 보고나서는 경계심이 무너진 거다. 명함에 적힌 이름을 검색해보고 나서는 이 사람도 자기처럼 피폐해져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다음에 만날 땐 무조건 밀어내는 게 아니라, 따라오도록 놔둔다.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장면이다. 보폭을 맞추며 걷는 것, 일부러 의도했다. 멜로적인 장면은 아니다.


재연은 계속 벽을 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훈은 그저 자신이 쓴 소설에 빠져 한 명의 여자를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멜로처럼 그려지길 바라진 않았다.


Q. 관객들이 영화를 본 후 담아가길 바라는 게 있나.


A. 그냥 이 영화를 어렵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유리정원’의 장르는 소설이다. 한 편의 소설을 읽듯 볼 수 있는 영화다. 책 읽어주는 남자도 나온다. 나레이션 하기 딱 좋은 목소리를 보유한 김태훈 씨가 읽어준다(웃음). 그 사람 목소리를 따라 영화를 보시면 좋지 않을까. 


사진 = 올댓시네마 제공


에디터 이유나  misskendrick@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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