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워 술을 먹었다
내가 미워 술을 먹었다.
내가 다시 불쌍해 술을 먹었다.
남몰래
울며 잠든 밤이 많았다.
시인보다는 동화작가로 유명한 정채봉 님의 ‘술’이라는 시다.
시인은 2001년 5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간암.
한국 문학계의 큰 어른이라고 칭송받던 고은 시인은 2017년 성추행을 폭로한 미투에 휘말려 명예와 권위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를 삭제 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이로 인해 그의 시를 사랑한 많은 독자들을 실망시켰다.
2018년, 유명 뮤지컬 배우의 남편은 운전 중 화물트럭을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켜 동승하고 있던 젊은 단원 2명이 사망하고 아내와 이혼했다.
2019년 5월, 신혼인 여배우가 3차선 도로에서 주행 중 갑자기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도로 위로 나와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건들 사이의 공통점은 바로 술이다.
정채봉 시인이 돌아 가신 원인이 술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고은 시인은 소문난 주당이고 문제가 된 성추행이 음주 상태에서 일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다. 위 2건의 교통사고도 음주운전이었고 안타깝게도 세 명이 생명을 잃었다.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교육 수준도 높은 분들이 황당하고 상식 밖의 행동을 하거나 공적인 말실수로 한 순간에 명예와 돈을 잃는 경우가 있다. 술을 먹고 이런 실수를 한다.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중대 범죄 살해, 강간, 폭행도 술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하루 37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데 술을 마신 상태에서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또한 술은 아주 천천히 사람의 뇌와 몸을 병들게 한다.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뇌, 심혈관 질환을 일으키며, 간암, 췌장암의 발병률을 증가시킨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알코올로 인해 손상된 뇌는 성격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 외에도 술의 해악을 경고하는 수많은 연구조사 자료가 있으며 매스컴에서도 이런 위험성을 수시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흡연에 대한 혐오감과 거부감은 높지만 한국에서는 음주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왜 음주에 대해서 이렇게 너그러울까?
일단 남녀를 불문하고 음주율이 높고, 술자리가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기쁠 때, 슬플 때, 우울할 때, 화날 때, 무료할 때, 밥 먹으면서, 친구를 만나서, 가족 모임에서, 회사나 학교에서 단합을 도모할 때, 결혼식, 환갑, 생일, 기념일, 장례식장.. 술 먹을 일이 천지고 어느 장소에서나 쉽게 술을 접할 수 있다. 게다가 국민 술 소주는 음료수보다 싸다. 알코올은 담배만큼이나 인간의 뇌와 몸을 천천히 망가뜨리는 아주 해로운 물질임에도 일상에 만연된 음주문화, 주류회사의 엄청난 광고와 마케팅, 한국 사회 특유의 음주 후 실수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알코올 남용을 조장하고 방치한다. 물론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술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슬프고 괴로울 때 위안을 주며, 축하와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흥을 돋운다. 인류가 수렵생활을 했을 때부터 있었다는 오랜 술의 역사만큼이나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물과 음식처럼 어쩌면 술은 필수품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주하는 인간들이 모두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마약이나 담배처럼 술도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알코올의 위험성과 중독성에 대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처럼 관용적인 음주문화와 술 마시는 것이 일상인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술 먹고 저지른 많은 실수로 인생을 낭비했다고 고백한다.
처음에는 맥주나 와인 한잔으로 음주를 시작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천천히 뇌와 몸을 망가뜨리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순간이 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코올 의존증이나 주기적인 남용 같은 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런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며, 술 마시는 모든 사람들이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될 수 있다고 알람을 울린다.
사람들은 보통 알코올 중독자 하면 역 근처에서 만나게 되는 코가 빨갛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 아침부터 술 냄새를 풍기는 노숙자를 떠 올린다.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음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병원에 입원한 사람을 연상하기도 한다. 아니면 의지가 박약하거나 절제가 안 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술을 먹고 길에서 자거나, 코가 빨개져서 담배를 구걸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반복되는 블랙아웃, 황폐해지는 정신세계, 기억은 안 나지만 뭔가 불쾌한 느낌이 남아 있는 수많은 실수에 대한 수치심으로 단주를 결심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술이 가진 중독성 때문이고, 그동안 마신 술이 우리의 뇌신경세포에 이상과 변형을 초래해 생긴 병이며, 이 병에 대한 치료법은 절주가 아니라 영원한 “단주”. 즉, 오늘 하루 안 먹겠다는 매일매일의 결심과 실천뿐이라고 말한다.
한때 금연 관련 책을 보면서도 같은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참는 거라고.. 그런데 저자는 술이 담배보다 더 해롭다고 경고한다.
담배를 많이 피고 운전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는 않는다. 성희롱을 하거나, 길거리에 구토를 하거나, 남의 집 앞에서 소변을 보거나, 지하철에서 잠들어 내릴 곳을 한참이나 지나쳐서 깨거나, 모르는 사람과 주먹다짐을 하거나, 손이나 얼굴에 기억나지 않는 상처를 입거나, 오래전에 헤어진 옛 애인에게 전화를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절제할 수 있다고.. 적당히 먹으면 괜찮다고.. 어차피 누구나 한두 번은 할 수 있는 실수인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술을 남용하는 걸까? 필름이 끊기고, 다른 사람에게 주사를 부리는 것은 술 먹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는 웃고 넘어갈 실수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술을 절재 할 수 있고, 즐거운 사회생활을 위해서 마신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처음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그랬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 알코올 중독은 아주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저녁 그림자처럼 찾아온다.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특정 암에 취약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유전자 검사 결과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암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이런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술로 문제를 일으켜서 유전적으로 알코올 중독에 취약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알게 모르게 술을 마시는 양과 횟수가 늘어난다면, 블랙아웃을 경험하는 횟수가 늘고, 성격이 변하고, 집중하기 어렵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안타깝게도 이미 병은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 이병은 불치병이 아니며 단주로 치료가 가능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신의 13가지 절제 덕목에서 과음을 삼가하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술로 인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이런 자경문을 만들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태백산맥을 집필한 조정래 작가는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말짱한 정신으로 매일 일정량의 집필을 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내가 좋아하는 고은 시인님의 시다.
문단의 거목이신 두 분이 생각나는 술 마시기 좋은 밤이지만 오늘은 맥주를 마시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