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제임스 홀리스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공포 영화

by 알토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기억에 남는 공포영화는 비교적 마일드한 미저리 정도다. 오래전 영화를 보면서 빨리 밝은 곳으로 나가고 싶었고, 그저 픽션인 영화라고 놀란 가슴을 다독거렸었다. 2시간 내외인 러닝 타임 동안 몇 번이나 비명을 질러대고 놀랐는지 세본 적도 없다. 당황스럽게도 저자는 이 책에서 중년의 시기를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공포영화” 로 비유한다.

"공포영화도 무서운데... 게다가 러닝 타임이 2시간이 아니라 아주 느리다고..그럼 도대체 몇번이나 놀라야 되는 거야! "

이미 중년에 들어선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James Hollis는 1940 년에 출생한 융 학파의 심리학자다. 그의 첫 저서인 이 책의 원제는 < The middle passage - from misery to meaning in midlife >이다.

직역해서 <중간 항로 – 불행한 삶에서 중년의 의미로>라고 제목을 붙였으면 아마 서점 진열대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Middle passage,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중간 항로보다는 책 제목에 "마흔"이 들어가야 독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다.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마흔'과 '불혹'을 검색하면 과거의 베스트셀러를 포함해 많은 책이 검색되지만 '쉰'이나 '지천명' ,‘육십’이나 ‘이순'에 대한 검색 결과는 초라하다. 작은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읽는 것이 피곤해지고 책을 손에 드는 일이 줄어든다. 나이 든 세대는 출판시장의 고객층에서 점점 멀어지고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주변세대가 만든 이야기와 읽을거리를 훔쳐보게 된다. 아무래도 활자 대신 눈의 피로가 적은 동영상에 눈이 간다. 의외로 50대에 유튜브 구독자가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지 않나 추측해 본다.


한글 제목은 좋지만 책의 내용을 보면 원제가 더 정확하게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두 개의 M, 즉 Misery와 Meaning in midlife 다. 저자는 중년을 Misery라고 말한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중년의 삶은 혼돈이 만든 불행이라고 주장하며 이런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부모의 보살핌이 절대적인 유년기를 지나 1차 성년기가 된 성인은 제한된 프리즘으로 세계와 자신을 바라본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 아니라 왜곡된 자아을 가지게 되는데 자신의 의무, 역할, 위치, 사회적 평가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2차 성년기를 향하게 되는데 이 1,2차 성년기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시기를 중간 항로라고 한다.

중간 항로를 지나면서 내면에 묻혀 있던 무의식의 자아가 용솟음치게 되고 “나는 누구인가?” 같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심하면 우울증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우울증을 부정적으로만 볼게 아니라 내면의 자아가 아프다는 신호이니 이 울림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년 체험이라는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앞이 잘 안 보이는 고글을 쓰게 하고, 다리에는 깁스처럼 생긴 보조기를 착용한 후 길을 걸어보는 체험을 하게 한다. 이런 체험을 하고 나면 보고, 듣고, 걷는 일상의 평범한 일들이 어르신들에게는 힘들고 고된 몸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쉽지만 중년 체험이라는 것은 없다. 그저 이런 책을 통해 나의 앞에 아주 길게 펼쳐질 공포영화를 간접 체험할 수밖에 없다. 어느덧 하늘이 내게 준 사명을 알게 된다는 나이, 지천명(知天命)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답을 못 찾고 헤매고 있다.

건강이나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사교육비 때문에 모아놓은 돈도 없다. 이제는 현업에서 물러나야 되니 마음은 초조해지고, 퇴직 후 삶이 걱정이다. 아직 건강하신 부모님도 모셔야 하고 아이들 취업과 결혼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한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고 이런 걱정들로 밤 잠을 설치게 된다. 끝이 언제인지 모르는 터널을 통과한다는 것은 힘들고 불안한 일이다. 만약 이런 혼란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면 일상의 하루하루가 악몽이 될 수밖에 없다.


중년의 늪에 빠져 활기를 잃고 있던 나에게 딸아이는 책 한 권을 선물로 건넸다.

김형석 교수님이 쓴 <백 년을 살아보니> 다.

100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일간지에 칼럼을 기재하시는 그분의 비망록이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한 아내와 사별하고 연이어 어머니도 하늘나라로 떠났다. 고령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병으로 쓰러지는 힘든 시간을 보내셨지만 놀랍게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칠십 대였다고 하신다. 100세를 사신 분 앞에서 나 같은 아이가 삶에 대해서 뭔가 깨달은 것처럼 까불었던 것이다. 인생에 대해서 아는 척하지 말고 좀 더 삶에 엄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을 지났을 때도 나는 인생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처럼 세상 앞에서 심하게 흔들렸었다.

중간통로에 서서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는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어느 애주가의 고백 / 다니엘 슈라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