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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Aug 13. 2024

렛미인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이케아 쇼룸에 가면,

노란 스탠드 아래 푹신한 소파에 앉아,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한 가족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소곤소곤 나누는데, 간간히 웃음이 팝콘처럼 터진다.  발치에는, 보드라운 플라워 패턴의 러그에서 졸고 있는 살찐 고양이가 가르거리고, 창밖으론 소록소록 눈이 내린다. 이 장면은 쇼룸을 바라보며 내가 만들어낸 증강현실이다. 창문 없는 한평 고시원이나, 반지하 단칸방에 사는 누군가에게는 비현실적인 심플함이지만 대개는 이런 아늑한 일상을 이루기 위해 밤낮없이 달린다.

  

희한하다. 한때 무자비했던 바이킹의 후손들이 이런 목가적인 삶을 살며, 다국적기업까지 만들어 이 먼 타국에 북유럽의 낭만을 재생산해 낼 줄이야.  야생에서 모닥불을 피운채 생고기를 뜯어먹던 손가락과 입에서 흐르는 핏물. 커다란 투구. 부리부리한 안구는 언제든 훅 튀어나올 듯하고, 그런다 한들 눈알마저 씹어버릴 기개를 지닌, 신의 진노라 불리었던 그들이었다. 나이트워치(왕좌의 게임)에서 와이들링과 아더들을 상대할법한 아우라를 지닌 자연재해와 동일 취급을 받기도 했던. 그런데 한편으론 뛰어난 항해술과 노예무역을 주도하는 상술을 지니기도 했던 현실주의자들. 덕분에 자손들은 허허벌 눈밭에서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중이다.


스키와 개썰매를 타고  직장과 학교를 오가는 사람들.  9호선 지옥철에 구겨진 몸을 싣고 이리저리 공기인형처럼 흔들리는 나와 내 이웃들은 이웃에 산타마을이 있고, 시내에서도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지형과  피오르드 해안을 소유한 그들이 몹시 부럽다.


아무튼 이제 스웨덴 국적의 영화 렛미인으로 넘어가,

영화의 큰 장점은 노골적이지 않아 더더기가 없다는 것.

한창 빠져있었던 노르딕 누아르의 기법과도 다르다. 롱테이크로 대형 침엽수 군락을 지나, 눈 덮인 마을을 비추고, 하얀 눈밭에 난 핏자국을 따라가면 살얼음 낀 살인현장이 있던 기존의 루틴이 아니다. 사회비판적인 소재가 대부분인 그것들은, 추적스릴러라기보다는 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을 4k로 펼쳐보는 그런 기분이었다. 살인이고 나발이고, 저 풍경 좀 보게나. 뭐 이런.


이 영화는, 기존 북유럽 영화들의 문법이 없다.

두 외로운 아이의 뽀얀 입김과 오스칼의 디룽거리는 콧물, 이엘리의 아주 커다랗고 파란 눈동자, 자작나무 숲의 발자국 소리만으로 족하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아이의 발자국을 쫓아 그들이 눈밭에 하나둘씩 흘리고 가는 빵부스러기를 모아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내 그랬다. 아이들이 사부작거리며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면, 열두 살 이엘리가 살았던 수백 년의 외로움의 무게가 느껴졌때마침 어리바리한 오스칼이 이엘리를 토닥여주는 장면에선, 내가 등을 내어준 듯 위로를 받는 이 기묘한 이야기는 무엇.


초반 오스칼과 이엘리가 등장하는 장면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하얀 팬티에,  하얀 속눈썹, 몸통이 모두 하얀 금발의 아이가 주머니칼을 휘두르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늦은 밤 택시에서 내리는 늙은 남자 호칸(엘리의 남친)과 이엘리. 카메라의 렌즈는 오스칼과 이엘리가 사는 붉은 벽돌의 조용한 맨션을 창문을 통해 실루엣만으로 열심히 보여준다. 그러다 둘 사이에 신뢰가 쌓이는 과정에서 오스칼과 이엘의 눈망울과 때낀 손톱, 포개지는 두 개의 손, 정적이 감도는 놀이터가 클로즈업될 때는 마치 기념일에 가게 주인이 찍어준 폴라로이드처럼 희미하지만, 박제된 쁨이 느껴졌다.


쇠냄새가 풍기는 낡은 정글짐에 걸터앉아 두 아이가 나누는 대화가  광활한 침엽수군락보다 더 밀도 있고 차가웠던 이유는 뭐였을까.


살인사건 기사를 스크랩하고 주머니칼을 휘두르며 가상 속에서 일진들에게 복수를 꿈꾸는 아이, 오스칼.  모스부호를 공부하고 큐브를 갖고 노는 이 사차원의 아이는 누런 셔츠의 단추를 다 채우지도 않은 채, 엉클어진 까만 머리와 창백한 얼굴,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이엘리가 너무 좋다. 정글짐의 꼭대기에 걸터앉거나 똑바로 선채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고 섰는 이엘리는 레지던트이블의 엘리스나 엑스맨의 진과 흡사해 보였지만, 그래도 가장 어울리는 건 지구 멸망의 날, 유일하게 살아남은 외로운 뱀파이어란 이름.


모든 장면이 고요하다.

호칸이 자작나무 숲에서 어설픈 살인을 하고, 굴다리에서 이엘리가 남자를 죽이고, 이어 피를 빨린 여자가 병원에 입원한 채 온몸에 불이 붙어 죽는 그런 어수선한 장면들이 있지만, 이 역시 내겐 '정적'의 다른 이름이다. 마치 오스칼과 이엘리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는 거 같다. 주변 인물들은 다 사라지고 두 아이의 속살거림과, 정글짐을 통과했을 바람 소리만 꽉 차 있다.


호칸이 이엘리의 피를 구하러 나서며 장비를 챙기는 장면과 아침에 우유에 말아먹는 시리얼. 손전등과 깔때기와 피를 담을 넉넉한 수통. 그리고 그가 갖춰 입은 하얀 셔츠와 바지. 이런 일상들을 이엘리는 수백 년간 누군가와 함께 했을 터였고, 그들은 마지막에 목덜미를 내어주고 그녀를 위해 사라졌을 것이다.

가장 임팩트 있는 살인현장은 자작나무 숲이다.  미장센이 소름이다. 산책하는 사람과 그의 개까지 드나는 환한 숲, 눈에 반사된 빛, 놀라 도망가는 늙은 호칸과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수통에 피를 쏟고 있는 청년, 그리고 그걸 무심히 바라보는 하얀 개.


이뿐 아니라 두서없이 한 장면을 아무렇게나 골라도, 희미한 음영이 드러나는 그림이 된다.

렛미인은 호퍼의 그림과 닮았다. 

쓸쓸하고 적조하다.


미쳐 날뛰는 뱀파이어들이 20세기까지의 초창기 멤버들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자의식 강한 뱀파이어들로 바통터치 된 느낌이다. 잔혹동화이면서, 해피엔딩인데 새드엔딩인 영화.

 

오스칼을 괴롭혔던 일진무리의 몸을 조각내는 이엘리. 비명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수영장의 집단 살인극은 수면 위로 올라온 오스칼이 이엘리의 커다란 눈동자와 만나며, 끝난다.    

그럼에도 심심해서 판타지가 된 영화.


한편 이엘리의 푸른 눈동자의 동공이 너무 커, 그 안에 고인 눈물이 몇 리터쯤일까 궁금했던 이상한 영화.

 

이엘리, 그곳은 평안한가.

(드라마 '아저씨'대사 일부)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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