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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다

나는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다      


 어리광은 누군가에게 떼를 쓰는 것으로 무언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다. 주로 상대방과의 관계가 매우 친근하고 소위 만만할 때 어리광을 통해 용돈이나 다른 무엇 가를 쟁취하기 위해 비굴함을 무릅쓰고 하는 행동이다. 상대방 앞에서는 부끄러움도 없고 아무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참 자연스럽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원초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어리광의 또 다른 말은 애교이다. 애교는 아기가 엄마에게 표현하는 행동이라 흔히 생각하지만 애교는 연인관계나 심지어 사회생활에서도 꼭 필요한 행동이다.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 애교를 통한 보상은 더 사람을 더 멋진 지위나 더 멋진 성품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애교가 자연스러운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애교를 배운 적이 없다며 애교에 무감각한 이들도 있다.    

  

 이런 어리광과 애교를 나는 잘못한다. 아니 해본 적이 없어 할 능력이 없다. 하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본능을 거스른 것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지고 여유를 갖고 업무를 처리할 때 문제가 생기면 어리광 즉 성인으로 보면 아부라고 할 수 있겠다. 아부를 하면서 그 갈등 상황을 슬쩍 넘어가면 되는 것도 답답하게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급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애교를 부리고 꿀에 발린 좋은 말도 하면서 잘 보이려고 해야 하는데 나는 자존심이 센 편이라 애교가 어색해서 상대방과의 관계를 더 어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자칫 잘못 표현되거나 마음에 있는 말을 잘못해 후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애교를 부리는 후배 교사나 어리광을 피우는 후배 교사를 싫어하는 데 있다. 나와는 다른 일반가정에서 성장한 귀여움과 이쁨을 받은 이들이 애교를 부릴 때 즉 아부를 할 때에는 사실 짜증도 난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 하지 못한 애교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고 부럽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을 포장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좀 불편하기도 하다. 나는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상대방도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는 관계를 중요시 하는 데 즉 인간적 관형이 아니라 업무적 관계형이라 내 자신이 답답하기도 하다.  

    

 보육원에서 어리광을 부린 적이 없다. 보육원 사무실에서 야단을 치면 어느 정도 수긍하고 알겠습니다. 좀 봐주세요라는 표정과 말을 하면 쉽게 넘어갈 문제도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청소년기 때 왜 그랬는지 나도 궁금하지만 유아기 때부터 부모님에게 장난감을 사달라며 애교를 부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육원에서 후원자님들께 감사편지를 강제로 쓰라고 하는데 왜 나는 정작 돈을 받은 적도 없는 데 왜 써야 하냐고 화를 냈다. 보육사들은 사무실 직원의 강요에 우리 모두의 사이가 불편해졌다. 알고 보면 후원금은 모든 보육원생들이 나누어 사용하니 개인적으로 돈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모르고 나는 감사편지를 쓰지 않아 꼭 필요한 학교 준비물을 받을 수 없었다. 어리광을 부리지 않아 결국은 내가 피해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사무실 직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나는 내 방식대로 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투정을 맘 편하게 부린 적도 없다. 화를 내며 그냥 화를 분출했을 뿐이지 투정은 하지 않았다. 반찬 먹기 싫어요, 자기 싫어요, 씻기 싫어요 등 의식주와 관련된 매우 기본적인 생활에 있어 나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투정을 한다 하더라도 내 의사를 잘 존중 받지 못한 것이다. 단체생활에서 정해진 규칙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가장 기본권이 보장은 되었지만 강제로 이루어지는 보장은 매우 큰 불쾌감을 느끼게 하였다. 청소년기 때로는 반항을 하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반항보다는 삶에 대한 포기와 보육원 생활은 외면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러한 반항적인 행동을 지속하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아동들이 투정과 반항사이에서 고민하며 결국은 보육사와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아 이탈 행동을 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보육원 아이들은 애교를 주로 후원자님들에게 많이 한다. 정말로 그들은 보호아동을 사랑하고 보고 싶어서 봉사하러 왔기에 아이들의 모든 장난을 받아주었다. 아이들이 옷을 잡아당기거나 얼굴을 꼬집는 등 짓궂은 장난에도 화를 내기보다 웃으며 그 장난을 받아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이들이 평소 사랑을 받지 못해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길들여진 것뿐이다. 마음속에 잔재 된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사회적 불만들을 어리광을 표출하면서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다. 나도 물론 어느 정도 어리광을 부렸지만 성인이 되어 후배들이 나를 반기거나 다른 후원자님들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참 부끄러울 때가 있다. 후원자님들은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보며 보육원에서 잘 크고 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참 본능적이며 한편 계산적이라 후원자 중 누가 더 어리광을 잘 받아주는지 확인하고 그분과 손을 잡거나 함께 놀고 싶어한다. 반면 보육사들은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평소 절대 웃지 않던 아이가 웃거나 말을 잘 안 듣는 아이가 후원자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보면서 왠지 배신감을 느낀다. 정작 길러주는 이는 난데 후원자를 더 좋아하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함께 살면서 매일 혼내고 꾸중하는 보육사보다 아낌없이 좋은 것만 주고 돌아가는 후원자를 더 잘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릴 적 어느 봉사자님께서 '나 다시 보러 올게'라면서 돌아간 적이 있다. 그 말을 당연히 아이들은 믿지 않지만 한 편으로는 다시 올 것을 기대한다. 물론 다시 오는 이들도 많지만 그 말에 몇 달을 그리워하며 속상해하기도 한다. 애교를 부리고 싶지만 상대가 없는 그 본성에는 어리광을 상대해줄 누군가가 필요한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지난해 12월, 아동권리협약 30돌, 아동의 대안적 양육에 관한 가이드라인 채택 10돌을 맞아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아동의 권리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처음으로 '고아원'이 아동에게 해가 된다고 밝힌 것이다. 나아가 고아원은 점차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한, 이 결의에서는 보육원 시설을 방문하는 어떠한 형태의 자원봉사 활동이든 아동의 시설입소를 조장하는 데 영향을 준다고 경고한다. 유엔 가입국인 한국 정부도 물론 아동의 양육에 대한 권리 결의에 참여했다. 하지만 정작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체로 생활하는 곳에서 아동은 본능적인 감정을 온전히 표출할 수 없다. 


 온전한 가정이라면 부모와 자녀와의 충분한 관계를 통한 즉 적당한 애교와 어리광, 투정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사회생활에 필요한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아동복지시설에서 제공하는 외형적인 것도 참 중요하지만 이러한 감정표현을 위한 소통이 부족하다면 보호아동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을 갖게 될 것이다. 보육원은 아이들의 의사가 존중되어야 하며 아이들도 어느 정도 애교와 투정을 부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보육사는 아이들의 투정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아이들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아이들도 보육사의 양육에 대해 불평이 있더라도 서로 존중하면서 소통을 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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