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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부모가 있을까?

세상에 나쁜 부모가 있을까?     


 세상에 나쁜 부모가 있을까? 결론은 있다. 나도 부모이지만 부모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지만 양심이 없는 듯한 부모도 있다. 부모라고 하면 누구나 기분 좋고 든든함을 느끼겠지만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부모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맛난 것도 사주고 대화도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아주 능력 없는 아빠는 아닌 것 같다. 부모는 누구나 되는 것도 아니고 부모 역할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부모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가정에 대한 소중함과 가족의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더불어 부모상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습득할 것이다.      


 자식을 위해 온갖 수고를 다 하여 헌신적으로 돈을 벌거나 유학을 보내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부모들도 있다. 재벌은 재벌대로 후계자 양성을 위해 어릴 때부터 특별한 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부모의 경제 능력과 학벌 등에 따라 아이들의 성장 속도가 달라지며 미래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부모라고 하면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뜻하지 않게 임신을 한 이들이 아니라면 누구나 자신의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고 심지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생각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동물들도 새끼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새끼를 위협하는 동물과 맞서 싸우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동물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나는 부부전문가는 아니지만 부모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또한, 자식을 버리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서두가 길었지만 오늘은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보육원생들이 생각하는 친부모, 그리고 퇴소 후 친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한 여자 청년의 이야기이다. 한 젊은 부부의 애듯한 사랑의 결실로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어느 날 무슨 이유인지 남자는 가정에 소홀해지면서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여자를 수시로 때렸다. 여자뿐 아니라 여자아이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런 남편에게 어떤 대항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을 하지 않는 남자를 피해 여자는 돈을 벌러 나갔다. 학교에 갔다 온 여자아이를 남자는 성폭행하였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반항하면 엄마가 더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러든 어느날 여자는 큰 결심을 하고 이혼을 하게 된다. 여자의 거주지는 수도권이었다.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 남자와 아이들을 떼어놓고자 경북 어느 지방 소도시 보육원에 아이들을 맡긴다. 여자는 최소한의 부모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보육원에 맡겨진 아이들은 부모와의 이별에 대한 트라우마로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표준어를 쓰니 친구들이 비꼬고 따돌렸다. 결국, 여자아이의 남동생은 학교 부적응과 보육원 형들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가출하여 친엄마에게 돌아가 자연스럽게 두 남매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여자아이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스스로 자립을 해야 할 시기를 맞이하였다. 생모도 재혼을 하였다. 여자 청년은 생모와 연락을 하였으며 새아빠와도 편하게 지냈다. 새아빠는 그 청년이 자립할 때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생모의 죽음이 그 새아빠와의 관계를 서먹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새아빠는 여전히 그 청년에게 먼저 다가와 결혼식을 할 때 혼주석에 앉을 정도로 청년을 아꼈다. 


 30여 년을 연락이 없던 어느 여자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름 아닌 새엄마였다. 다짜고짜 친부가 죽었으니 와서 장례를 치르라는 것이었다. 남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남동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안 간다며 알아서 하라고 했다. 여자 청년은 친부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지만 황당하고 어이가 너무 없었지만 자신을 낳아줬다는 그 하나만으로 장례식에 가 장례비용으로 몇백만 원을 지출하였다. 본인의 진정한 부모는 새아빠이며 그분의 장례식 때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야 하기에 정작 생부의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정말 용기 있는 결단이다.      


 두 번째는 어느 남자 청년의 이야기이다. 어릴 때 부모와 헤어져 보육원에 입소한 아이는 왜 보육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전혀 모른다. 부모의 학대 같으면 입소 이유가 명확하지만 어느날 부모에 의해 보육원에 맡겨진 아이는 퇴소까지 한 번도 부모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어느 원망도 잘 하지 않았다. 헤어져 있는 것이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보육원 생활에 익숙함을 느끼고 대학을 졸업 후 회사원이 되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어 문 듯 갑자기 부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혼주석에 앉힐 분을 생각하고 배우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여자친구와 함께 주민센터에 가게 되었다. 다행히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정확해 자신의 호적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친부모를 만나게 되었다. 부모는 청년이 어떻게 살았는지 참 궁금해했다. 자식을 찾고 싶어 보육원에 가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 보육원에 살고 있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찾고 싶었다는 말을 순전히 거짓이었지만 청년은 속으로는 황당했지만 아무런 대꾸로 하지 않았다.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청년은 부모에게 듣고 싶은 말이나 어떤 미련도 없었다. 단지 살아 있는지만 알고 싶었다. 결혼을 약속한 청년은 결혼을 앞두고 생부에게서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다. 자신이 간이식 수술을 해야 하는데 현재 살고 있는 자식과는 수술이 안 되니 그 청년에게 간이식을 부탁한 것이다. 이복동생이 간이식이 안 된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부탁을 듣고 들어줘야 하는지 며칠을 고민했다. 청년은 평소 헌혈을 자주 하며 선행을 베풀기도 했기에 이번 일이 남 일까지 않았다. 사실 생부와는 남처럼 생활했지만 결국 힘든 때에 자식에게 부탁하는 것을 안 들어줄 수 없었고 다른 분들은 모르는 분들에게도 가끔 장기기증을 하는데 청년은 자신을 낳아준 분에게 매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생부모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었지만 이번 일로 다시는 생부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계속 연락을 하다가는 자신의 인생도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주변에서 퇴소 후 자립정착금을 빼앗아 간 부모들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들었지만 이렇게 장기이식을 부탁을 받는 상황을 직접 맞게 되니 황당하면서도 안 도와줄 수 없었다.     

 

 세 번째 사례이다. 한 청년은 부모의 성격 차이로 인한 이혼하게 되어 여자 동생은 엄마가 데려가고 남자아이는 아빠가 키우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 남자아이를 맡기게 되었다. 그 청년도 보육원에 잘 적응하고 퇴소를 하였다. 퇴소 후 청년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아버지도 혼자 사는 게 썩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청년에게 돈을 달라고 하였다. 이유는 여자친구에게 침대를 사주기 위해서였다. 황당한 청년은 달라는 돈을 주었다. 앞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려면 생활비 명목으로 돈을 줘야 한다는 무언의 강요를 느꼈다. 사사건건 자신의 생활에 간섭을 하였다. 그동안 떨어져 살면서 부모의 간섭을 받은 적이 없던 청년은 어느덧 생부의 간섭이 너무나 짜증스러웠다. 자신의 인생이 왜 이리 불쌍한지 하루하루 실망스러웠다. 결국 청년은 공황장해와 우울증을 갖게 되었다. 어릴 때도 걸리지 않았던 정신 질병을 성인이 되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모와 함께 살면 더 이상 차별을 당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부모와 함께여서 오히려 자신의 인생이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라도 만나 자신의 처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빠에게 어렵게 엄마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 엄마에게 연락을 했지만 특별한 위로를 받지 못했다. 여자 동생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안 되는 말에 큰 상처를 입었다. 왜 자신은 엄마와 함께 살지 못하는지 따지고 싶었다. 엄마에게서 함께 살자는 말을 듣고 싶었다. 아니 함께 살지 않더라도 듣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간절함이었다. 그 청년의 욕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자살 시도를 하였다. 청년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아버지를 위로하며 오늘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자식은 부모를 닮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와 떨어져 성장한 이들은 누구를 닮아갈까? 떨어져 살았지만, 부모를 닮아 술, 담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보다 훨씬 더 마음이 깊고 품성이 착한 청년들도 있다. 위의 세 사례를 보면서 참 세상에는 부모 같지 않은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육원에 아이를 맡기고 성인 된 자식에게 무슨 낯짝으로 간이식을 부탁하는지, 자신의 여자친구를 위해 아들의 인생을 망치는 양심이 없는 어른, 재혼을 했음에도 스스로 남편을 책임지지 못하고 염치없이 돈을 부탁하는 어른 등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람들마다 사연이 있고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자식에 대한 애정이 식거나 스스로 인생을 보듬기도 힘들 수는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부모들이 헌신적으로 자식을 돌보는 것을 보면 누구나 힘들기 때문에 그렇기에 부모된 자들이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평범하지 않았던 내 인생이라 힘든 인생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보육원 아이들의 처절한 인생 스토리가 너무나 구구절절하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생각나는 것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러한 사연 많은 이들을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인생의 선배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아이들이 현실을 인정하고 보다 어른들이 깨어 있어 서로를 돌봐주며 우리가 그들의 부모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는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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