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도와주는 건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소중해서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때로 불편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도움을 주는 이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돕는 일은 당연하게 여겨지며, 아이들이 학교에서 서로 돕고 배우는 과정 역시 아름다운 행위로 간주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은,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보여준다.
나는 성장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제 40대 후반에 접어들었지만, 짧았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받은 사랑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스로 성장할 힘도 없고 여건도 마련되지 않았던 내게, 누군가의 관심과 후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때로는 “도움을 받았으니 잘 성장해야 한다.”, “받은 사랑을 되돌려줘야 한다.”라며 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인류애를 실천하려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어려움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보육원 아이들을 돕는 이들은 종종 그들을 단순히 불쌍하게 여기며 도움을 준다.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이 베푼 선행이 오히려 도움을 받은 사람을 나태하게 하거나, 스스로 더 노력하지 않도록 만들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실제로 보육원 후배 중에는 기초수급비와 장애인수당에 만족하며 자립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누군가의 세금을 마치 자신을 위한 당연한 돈인 양 여기는 이들도 있다.
만약 봉사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행위라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혹여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선행을 베푸는 행위라면, 그 또한 두려운 일이다. 자신의 선행이 반드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신념은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 정성껏 기부하는 이들 중 일부가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얻었다면, 그들의 선행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따라서,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곧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반드시 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도움을 베풀며 살아야 할까? 도움을 받는 이들에게 조건을 붙이기보다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귀하다는 인식이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 나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존재로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모두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 소중한 이들에게 진정한 이해와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의 선행은 비로소 더 빛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