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부모)를 찾는 이유
다양한 순간마다 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부모 참관 수업이나 운동회가 열릴 때, 친구들의 부모님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부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친구와 다투고, 그 친구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와 나를 꾸짖을 때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교차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날, 친구들이 부모님과 손잡고 함께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런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러움이 가득 밀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육원에서 친구들과 자유롭게 뛰놀던 시간이 나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다. 그래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크게 자리 잡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만날 수 없는 부모라면, 그리워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이 보육원에 찾아와 맛있는 간식을 가져오는 날이면,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잠시 피어오르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고아임을 밝히고 나니, 많은 이들이 부모에 대해 궁금하지 않냐고 묻곤 했다. 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없는냐는 질문도 여러 번 받았다. 보육원 친구 중 부모를 찾고 나서 더 힘들어하는 이들을 보며, 부모를 찾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모의 존재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내 궁금증은 억누를 수 있지만, 아이들의 궁금증은 풀어주고 싶었다. 내가 자라온 환경을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부모 없이 성장한 아빠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없는 상황이 아이들에게 또 다른 어려움을 주지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서게까지 나를 도와준 후원자들이 참 많다. 이분들은 ‘후원자’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친근하고 감사한 분들이다. 마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만큼 소중한 존재들이다. 나는 그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지금도 여전히 방문하면서 친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35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이 인연은 정말로 특별하다.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다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그들과의 관계는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분들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나를 도와주실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나는 진정으로 복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하지만 가끔은, 친부모와도 관계를 맺지 못한 상황에서 후원자들을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어리석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머니 같은 후원자들과 편안하고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친부모의 소재조차 알지 못하고, 그분들과 대화도 나눌 수 없으며, 앞으로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 인연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친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부모를 찾고 싶은 이유는, 내 정체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고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정체성은 평생 나와 함께할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고아인지 밝혀냄으로써 이 정체성이 완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연으로 부모와 헤어지게 되었는지, 보호받은 아이였는지, 발견된 아이였는지, 혹은 버려진 아이였는지를 명확히 알게 된다면, 내 존재의 조각들이 조금 더 맞춰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과거 EBS 프로그램 ‘파란만장’에 출연하여, 부모를 용서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리학자들은 “부모가 오죽했으면 너희를 시설에 맡겼겠느냐”면서 부모를 용서해야만 우리가 우리의 삶을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틀린 말이라고 볼 수 없지만, 우리가 부모를 용서하는 일은 우선 부모를 만나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부모가 우리에게 사과할지 안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모는 단지 부모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나를 낳아준 것만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존재이다. 부모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부모를 평생 함께할 사람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부모와 떨어져 산 이들에게는 부모는 그저 우리를 낳아준 생물학적 부모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부모라기보다는 이 세상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찾게 된다면, 지금의 내가 누구를 닮았는지 꼭 확인해보고 싶다. 나의 얼굴, 성격, 생김새, 신장, IQ 등 다양한 면에서 부모의 것과 비교해보고 싶다. 내가 아버지를 닮았는지, 어머니를 닮았는지, 혹은 그 둘 모두를 닮았는지 궁금하다. 하나뿐인 동생과 나는 성향이 크게 다르기에, 두 형제가 누구를 닮았는지 더욱 궁금하다. 비록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유전이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다.
무엇보다 유전뿐 아니라 나의 삶 가운데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에 환경이 얼마나 작용했는지도 궁금하다. 가끔 누군가는 농담처럼 말하고는 한다. “만약 네가 친부모와 살았다면 하버드대학교를 갔을 거야”라고. 물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말이지만, 보육원에서 자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장학사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내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지도 궁금하다. 나는 보육원이라는 폐쇄적이고 암울한 환경 속에서 무단히 노력했다. 학교에서 인정받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고,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싸움도 불사했다. 선생님들께 인정받기 위해 학교 봉사도 열심히 했다. 지금의 나를 만든 유전과 환경, 그리고 나의 노력이 각각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친부모를 만나게 된다면 그 답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를 찾고 싶다. 무엇보다 유전적으로 집안에 탈모를 비롯하여 병력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부모가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면 나의 정체성을 완벽히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앞으로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 큰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보육원생이 얼마나 노력해야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는지, 또는 보육원의 환경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나를 낳아준 사람들을 찾고 싶다. 아니, 찾아야 한다. 반드시 찾을 것이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왜 나와 헤어졌고, 어떻게 살고 있으며, 다른 친척들이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이를 통해 또 다른 보호아동들이 자신의 고아 정체성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환경을 탓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