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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Sep 24. 2023

[D-99] 커피 한 잔 마시고 화이팅

267번째 글

오늘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오늘 오후 3시쯤, 나는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은 이후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날씨는 무더웠고 우중충했다. 아침에 시원했던 것과는 달리 날이 습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인지 공기가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바람도 후덥지근했다. 고단하고 피곤하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빨리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친구가 말했다. "지금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필요한 것 같지 않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페를 찾아 나섰다. 마침 근처 상가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어서 몇 분 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빨대로 쪼오옥 빨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키자 좀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커피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오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날씨는 무덥지 않았고 오히려 선선했다. 우중충하지도 않았다. 아주 맑은 날이었다. 햇빛은 쨍하니 내리쬐고 구름 없는 깨끗한 하늘이 빛나는 좋은 날이었다. 햇살 사이로 바람이 기분 좋게 산들산들 불어오는 그런 날이었다. 몇 분 전에 본 잿빛 하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단지 커피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이렇게나 세상이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친구와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이 모든 게 커피 한 모금 때문에 달라졌다는 것이 어이가 없고 우스워서.


날씨는 카페에 들어가기 전이나 후나 비슷했을 것이다. 우리가 다르게 느꼈을 뿐. 그러니까 결국 모두 다 기분에 달려 있는 거였다. 같은 하늘이 기분에 따라서 칙칙한 잿빛이 되기도 하고 눈부신 푸른색이 되기도 하는 거다. 또 이 기분이라는 것은 내 신체적 상태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기분이나 감정은 보통 정신적인 것일 뿐이라고 오인받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신체는 정신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오로지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도 알고 보면 신체적인 원인이 있는 경우도 많다. 너무 오래 걸어서 다리가 아프고 피로해진 상태라던지, 더운 날씨로 인해 땀을 흘렸다던지, 전날 잠을 잘못 자서 허리가 뻐근하다던지, 그런 신체적인 문제들이 나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커피 한 모금이 신체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달라 보이는 상황을 겪게 된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나 연약한 존재다. 한 모금 마신 커피만으로도 시야가 이렇게나 달라지고, 아주 소량의 카페인이나 수분만으로도 텐션이 이렇게나 달라지는 존재. 그러니까 울적할 때나 피곤할 때 "왜 내 마음이 이렇지?"라고 자문하는 것보다 어쩌면 나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돌아오는 것이 더 좋은 해결법일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그 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 환경을 약간 바꾸고, 나의 신체적 상태를 조금만 바꿔도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일단 '커피 한 잔'을 마셔보는 것도 괜찮다. 이 '커피 한 잔'은 잠깐 나가서 걷는 산책이 될 수도 있고, 방의 가구 배치를 바꾸는 것일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나는 것이나 누군가와 잠시 수다를 떠는 것일 수도 있고, 벽에 그림을 거는 것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음식을 한 입 먹는 것일 수도 있고, 한숨 자고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옷을 갈아입는 것일 수도 있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내 주변 환경이나 내 신체에 변화를 주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 왜 무기력한지, 왜 마음이 무거운지 모르겠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해도 나쁘지 않다. 커피 한 잔 마시고 화이팅하기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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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4일,

침대에 엎드려서 흥겨운 컨트리 음악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Rachel McDermott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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