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Mar 25. 2022

<오페라의 유령>의 미래에 대한 대담

- 린제이 엘리스, 카베 타헤리언, 안젤리나 미한


린제이 엘리스와 카베 타헤리언의 뮤지컬 팟캐스트 MusicalSplaining의 <오페라의 유령> 편에서 발췌한 내용. 린제이 엘리스와 게스트로 참여한 안젤리나 미한은 <오페라의 유령>의 열광적인 팬으로 유명하다.




린제이: <오페라의 유령>의 결말이 내게 감동을 줬던 포인트는 팬텀이 마지막에 가서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는 점이야. 그 포인트에서 캐릭터가 완성되지. 팬텀은 평생 동안 감정적 성장을 하지 못하고 그 단계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잖아. 동정심을 보여주는 방법도 모르고. 왜냐하면 단 한 번도 타인의 동정심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팬텀은 늘 사람들을 자신이 갖고 놀 수 있는 장기말로만 봐. 내가 죽일 수 있고, 내가 속일 수 있는 장난감. 그런데 크리스틴은 마지막 순간에 팬텀에게 동정심을 보여주지.


안젤리나(이하 앤지): 맞아.


린제이: 크리스틴이 보여주는 그 약간의 동정심은 지금까지 팬텀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거야. 그리고 그 동정심을 처음 받아보는 순간, 팬텀은 그동안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 끔찍한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크리스틴과 라울을 보내주게 되지. 이 지점이 <오페라의 유령>의 엔딩에 내가 공감하고 감동을 받는 포인트야.

그런데 (최근에 <오페라의 유령>을 봤을 때는) 더 이상 그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어.


앤지: 나도 마찬가지야. 


린제이: 심지어 난 정말 말짱한 정신으로 2번째 줄에 앉아서 봤는데도 그랬어. 난 그 결말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 


앤지: 맞아. 도저히 <오페라의 유령>에 열광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또 얼마 전에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기념공연 DVD를 봤을 때는 그렇지 않았단 말이지.


린제이: 맞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아. 이런 비교를 하는 게 약간 치사하기는 하지만...


앤지: 아니야. 그게 진실인걸. 25주년 기념공연을 다시 봤을 때에는 아예 완전히 다른 경험을 했다고.


린제이: 그건 그래. 라민 카림루가 울부짖는 걸 듣는데 그건 정말...


앤지: 맞아.


린제이: 아, 그 배우는 페르시아계야.


카베: 오, 그렇구나.


(중략)


린제이: 나는 라민(이 연기하는 팬텀)의 내면에 슬픈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들어 있다고 느껴져서 좋았어.


앤지: 맞아.


린제이: 그리고 라민과 합을 맞춘 크리스틴 배우들도 다 뛰어났고.


앤지: 정말 그래.


린제이: 그래서 그 25주년 공연을 보면... 내 친구들 중에는 25주년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오페라의 유령>의 결말에 공감하지 못하다가, 그 공연 영상을 보고 나서야 "아, 이제 좀 알겠어."라고 말했던 친구들이 많았어.


카베: 팬텀과 크리스틴의 케미스트리 때문인가?


린제이: 정확해.


(중략)


앤지: 우리 엄마는 내가 <오페라의 유령>에 푹 빠져 있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 그러다가 25주년 공연 DVD가 나왔고 우리 가족은 그걸 같이 봤어. 그제야 엄마가 "아 이제야 알겠다. 이거 정말 재미있고 좋구나."라고 하시더라고. 25주년 공연은 정말 공들여 만들었고 출연한 배우들도 정말 잘 해냈지.


린제이: 최고의 배우들로만 꽉 채웠잖아.


앤지: 맞아. (주연 배우들뿐만 아니라) 카를로타도 최고였고. 


(중략)


린제이: 이건 그냥 <오페라의 유령>에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느냐의 문제야. 그리고 더 이상 <오페라의 유령>은 그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어.


앤지: 맞아.


린제이: 우리가 공연을 봤을 때 언더스터디 배우가 카를로타를 연기했어. 그 배우는 출연진 전체에서 유일한 흑인이었지. 나는 그 배우를 보고 처음에는 "와! 유색인 배우가 연기하는 카를로타라니! 이거 멋진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공연이 진행되면서 기분이 이상해졌는데, 카를로타 캐릭터가 무대를 독점한 오만한 기득권 캐릭터였다는 점 때문이야. 그 캐릭터가 무대에서 꺼지기를 (관객들이) 원하게 되니까. 이건 처음부터 유색인 배우를 위해 쓰이지 않은 캐릭터를 유색인 배우가 연기할 때 종종 생기는 문제인데... 흑인 배우는 카를로타를 연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야. 그냥 흑인 배우가 연기하면 이야기의 역학관계가 좀 달라져 버린다는 거지.


앤지: 나도 예전에 흑인 배우가 연기하는 카를로타를 본 적이 있어. 그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 팬텀을 연기한 흑인 배우들인 놈 루이스나 로버트 기욤이 연기하는 팬텀을 봤을 때도 그랬지. 하지만 팬텀 캐릭터와 카를로타 캐릭터는 다르잖아.


린제이: 맞아. 왜냐하면 놈 루이스가 팬텀을 연기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 흑인 남성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인 시각(*백인 여성을 공격하는 범죄자라는 편견)이 있잖아.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 이야기 내에서) 흑인 남성(팬텀)이 백인 여성(크리스틴)을 납치하고 폭행하는 장면들이 나오게 되니까... 반면에 흑인 배우가 팬텀이라는 아이코닉한 역할을 연기하게 되는 건 좋은 일이고, (배척받는 대상으로서의) 팬텀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해낼 수 있기도 했으니까 양가감정이 들었었지. 그런데 카를로타 캐릭터는 달라. 카를로타는 그냥 무대에서 사라져야 하는 건방진 캐릭터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이상한 기분이 들게 되는 거지.

사실 앤드류 로이드 웨버 본인도 컬러-블라인드 캐스팅의 열렬한 옹호자잖아. 특히 본인 작품들에서는. 근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대체 <오페라의 유령>에는 아직도 왜 이렇게 백인 배우들만 잔뜩 나오냐는 거야.


앤지: 완전 공감해. 그리고 다른 앤드류 로이드 웨버 작품들과 비교해봐도 <오페라의 유령>은 다양성이 많이 떨어져. 가끔가다 아시아계 크리스틴 한 명 정도만 나올까 말까 하고...


린제이: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보수적인 백인 남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왜냐하면 그렇게 안 하면 공연계 자체가 망해버릴 테니까. 그런데 우리가 저번에 <오페라의 유령>을 봤을 때, 아시아계 발레리나 1명과 흑인 카를로타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백인 배우들이었어.


카베: <오페라의 유령>의 흥행은 어때? 아직도 티켓이 잘 팔려?


린제이: 그럼! 물론이지.


앤지: 이 작품은 우리가 다 죽어서 사라진 뒤에도 계속 공연 중일 걸.


린제이: 핵전쟁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고 난 뒤에도 <오페라의 유령> 공연은 계속되고 있을 거야. 유일하게 살아남은 바퀴벌레들이 그걸 연기하게 되겠지.


앤지: 그리고 영화 <에이 아이>처럼 외계인들이 와서는 아직도 공연 중인 그 <오페라의 유령>을 바다 밑에서 발견하게 될 거야. 외계인들은 그걸 가지고 인류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아내려 하겠지.


카베: 공연의 퀄리티가 그다지 좋지 않은데도 계속해서 돈을 잘 벌고 있다는 뜻처럼 들리네.


린제이: 사실 맞아. 난 2000년대쯤의 <오페라의 유령>이 최고였다고 생각해. 그때는 이 작품에 어떤 압도적인 에너지 같은 게 있었거든. 마음에 들지 않는 특정 장면이 있더라도 푹 빠져서 볼 수 있었지.


(중략)


린제이: 좀 더 괜찮은 배우들이 이 작품을 연기한다면, 그리고 좀 더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낼 줄 아는 배우들이 연기한다면 아마 조금 더 설득력이 있기라도 하겠지. 이 작품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도 "난 별로지만 왜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지는 알겠네" 정도로는 반응할 수 있을 테고. 그런데 내가 최근에 몇 번 본 <오페라의 유령>은 내게 감동을 주지 못했어. 마치 디즈니랜드에서 코스튬을 입고 일하는 알바생들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어. 배우들은 지루해 보였고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 


카베: 이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서 제일 오랫동안 공연 중인 작품인 거야?


린제이: 응. 지금 기준으로 가장 롱런하는 뮤지컬이야. 두 번째로 롱런하고 있는 건 <라이온 킹>인데 그건 <오페라의 유령>보다 10년은 더 늦게 나왔어.


앤지: 웨스트엔드에서도 여전히 <오페라의 유령>이 공연 중이야. 거긴 <레미제라블>도 있으니까 <오페라의 유령>이 최장수 롱런 뮤지컬은 아니지만.


린제이: 2000년대에 <오페라의 유령>을 봤던 게 기억나. 그때 배우들은 훨씬 더 열정적이었고 훨씬 더 입체적인 캐릭터 연기를 선보였었어. 관객들도 훨씬 몰입하면서 즐거워했고. 그땐 정말 극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작품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제는, 글쎄. 이젠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가면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 건 화려한 세트와 무대 연출을 향해서지 배우들과 스토리를 향한 건 아니라는 게 너무 잘 느껴져. 이젠 다들 그냥 시늉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다들 매너리즘에 빠져버렸어.


앤지: 정말 그래. 그렇게 되어버렸어.


린제이: 그래서 말인데, 난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은 오페라의 유령이 필요 없는 것 같아.


(중략)


린제이: 우리한텐 이미 25주년 DVD가 있거든. 그것만 있으면 돼. 그걸 보는 게 훨씬 나아. 한 30년쯤 지난 뒤에 참신하고 현대적인 새로운 연출을 들고 와서 다시 개막할 수는 있겠지.


카베: 그동안은 <오페라의 유령>에 들어가는 자금과 공간들을 훨씬 더 새롭고 훨씬 더 괜찮은 작품들에 양보해줄 수 있게 될 거야. 150년씩 공연하는 뮤지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린제이: 뭐, 나는 (<오페라의 유령>의 팬이니까) 뭐 새로운 팬텀 배우가 들어온다거나 하면 그럴 때마다 가서 보긴 하겠지만, 이제 열정을 많이 잃었어. 심지어는 팬덤의 열성적인 팬들조차도 대부분 나와 비슷해. 더 이상은 <오페라의 유령>의 프로덕션 측에서 작품의 퀄리티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거든. 사람들이 열정을 갖고 이 작품에 참여하질 않아.


앤지: 이 작품을 12살 생일에 뉴욕에 놀러 와서 보게 될 모든 소녀들을 생각하고 있어. 그 애들의 부모님들도. 그 사람들은 공연을 보고 "와!" 하고 돌아가겠지. 이제 <오페라의 유령>은 그런 위치로 전락했어.


린제이: 그 작품을 보면서 적당히 좋은 시간을 보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야. 너무 질려버렸어.

작가의 이전글 브로드웨이에 <오페라의 유령>이 더 이상 필요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