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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25. 2022

브로드웨이에 <오페라의 유령>이 더 이상 필요할까?

어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웨스트엔드 공연 기간이 연장되었다는 프로덕션 측의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2022년 10월까지 Her Majesty's Theatre에서 공식적으로 공연을 이어간다는 소식인데요. 사실 <오페라의 유령>은 웨스트엔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1986년부터 35년이 넘도록 롱런을 해 오고 있으니 그다지 놀라운 소식은 아닙니다. 이 작품이 더 이상 공연을 이어가지 않고 폐막한다는 소식이었다면 정말 큰 충격이었겠지만요.


하지만 이 공연 기간 연장 소식은 제가 전부터 갖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을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오페라의 유령>이 더 필요할까?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과연 <오페라의 유령>이 이 이상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장기 공연을 이어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었어요.


제가 이 작품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의문을 제시하는 저 역시 <오페라의 유령>의 엄청난 팬입니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수십 번이나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했어요. 최근에도 여러 번 보았고요.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을 더 보면 볼수록, 점점 이 작품이 매력을 잃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오페라의 유령>에는 극장의 마법이 있었어요. 무대가 객석에 선사하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으로 오면 올수록 그 순간들이 점점 흐려지고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고 팬으로서 가슴이 아팠어요.


저는 이렇게 <오페라의 유령>이 마법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유가 지나친 랜드마크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브로드웨이의 상징이자 웨스트엔드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어요.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 중인 뮤지컬이자, 웨스트엔드에서는 <레미제라블>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오래 공연 중이죠. 누군가 뉴욕 관광을 가서 뮤지컬을 딱 한 편만 본다면, 그건 <오페라의 유령>일 겁니다. 런던에 가서 뮤지컬을 딱 하나만 봐야 한다면, 그것 역시 <오페라의 유령>일 테고요(아니면 <레미제라블>이요).


이렇게 어떤 작품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아주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랜드마크화가 일어나면 예술 작품은 단순한 관광 상품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잘 팔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판매율이 보장되는 상태가 계속 유지돼요.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프로덕션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프로덕션 측에서는 사람들이 랜드마크를 구경하러 오는 거지, <오페라의 유령>이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지 감상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오페라의 유령>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메가뮤지컬'로서, 이 작품은 관광객과 대중을 상대로 큰 수익을 올리고 그들에게 스펙터클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뮤지컬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랜드마크화는 <오페라의 유령>의 경우에는 어떤 부작용이 아니라,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젠 랜드마크로서도 너무 오래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가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에 품질 관리가 잘 안 된다고나 할까요? 작품의 질이 약간 떨어져도, 출연배우들의 실력이 약간 떨어져도 여전히 티켓은 불티나게 팔려 나갑니다. 또 작품을 개선하려는 노력, 신선하게 재해석하려는 노력, 시대에 맞춰 올드한 부분을 발전시키려는 노력, 추가적인 가치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그대로 놔두어도 너무나도 잘 팔리니까요.


그래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작품은 필연적으로 퀄리티 저하라는 문제를 겪게 됩니다. 꼭 필요한 최소 인원만 고용하고, '비교적 싼 값에 쓸 수 있는' 스태프와 배우들을 고용하고, 공들여 만들었던 무대와 의상은 점점 단순해지고 저렴해지고... 또 작품 자체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점차 평면적으로 변하고 납작해지는 문제도 있어요. 이런 문제는 롱런하는 뮤지컬들의 문제점으로 꾸준히 지적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은 이 문제점들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고요.


최근 <오페라의 유령>은 연출과 캐릭터 해석 면에서 점점 과도하게 '로맨스'만을 강조하며 캐릭터와 줄거리를 납작하고 지루하게 만들고 있어요. 또 조금씩 의상과 세트의 퀄리티, 배우진 및 무대 운영의 퀄리티도 낮아지고 있고요. 특히 코로나로 인해 공연계가 문을 닫았다가 작년에 재오픈한 이후 이런 퀄리티 저하는 더 가속되었습니다. 리뉴얼을 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변화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비욘슨이 디자인한 기존의 아름다운 무대 프로시니엄은 이제 휑하게 비어버렸고, 크리스틴의 화려한 드레스는(특히 '스타 프린세스' 의상) 볼품없이 변해버렸고, 몇몇 가사들은 단순하고 재미없게 바뀌었습니다. 게다가 웨스트엔드는 오케스트라 인원을 절반으로 싹둑 줄여버리기까지 했어요. 브로드웨이/웨스트엔드 재오픈 이후 <오페라의 유령>이 거친 변화들 중 좋은 것은 흑인 배우들이 크리스틴 역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그 외의 변화들은 대부분 안 좋은 쪽의 변화라고 느껴지네요.


재오픈 이후 브로드웨이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 이 작품의 제작진들도, 스태프들도, 배우들도, 관객들도, 모두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는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유명하고, 너무 인기 있고, 너무 오랫동안 공연했기 때문에, 다들 이 작품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작품이 점점 생명력과 열정을 잃고 있다고 느껴졌어요.


정리하자면, <오페라의 유령>의 지나친 랜드마크화로 인한 매너리즘과 계속된 퀄리티 저하 때문에 이 작품이 더 이상 예술작품처럼 느껴지지 않고 마치 놀이공원이나 관광지처럼 느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이 점이 더 크게 느껴지고요. 그래서 "브로드웨이에 <오페라의 유령>이 더 이상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거죠.


물론,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오페라의 유령>을 여러 번 볼 거예요. 또 <오페라의 유령>이 막을 내리면 정말 슬퍼할 거고요.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이 뮤지컬을 위해서라면, 어쩌면, 이제 Majestic Theatre(브로드웨이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1988년부터 34년째 공연 중인 극장)를 다른 새로운 작품을 위해 내어 줄 때가 된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조금은 들긴 합니다. :)



*이 관점을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오페라의 유령>의 미래에 대한 대담을 번역해서 첨부합니다. 저와 생각이 비슷해서 공감이 많이 되었던 내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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