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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04. 2023

[D-303] 두려움을 이겨내는 익숙함

63번째 글

오늘 가족들과 함께 한탄강 주상절리길에 다녀왔다. 이 길은 절벽에다가 받침대를 박아 넣고 그 위에 다리를 만든 잔도 형태의 길이었다. 약 3.6km를 이 아슬아슬한 잔도를 따라서 걸어가야 했는데 도중에 내려갈 수 있는 통로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다 걸어서 나가거나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 길은 철사 구조물로 만들어져 있어서 바닥에 숭숭 구멍이 나 있어서 아래가 훤히 보였다. 아예 유리판을 깔아 놓은 부분도 있어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가 한눈에 다 보였다. 절벽과 강, 나무, 주상절리와 바위들이 어우러진 흔히 볼 수 없는 절경이었고 하늘도 맑았고 물도 맑았고 물소리도 듣기 좋았다. 멋진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는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는 것.


나는 높은 곳이 무섭다. 더 정확하게는 높이 설치된 인공적인 구조물 위에 올라가 있는 그 상태가 무섭다. 내가 실수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기보다는 그 구조물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사가 하나 빠지거나, 철근이 하나 무너지거나, 못이 하나 부러져서, 그동안 아무 문제 없이 잘 견디던 구조물이었지만 하필 내가 발을 디디는 바로 그 순간의 자극으로 역치를 넘어버리는 바람에 발판이 쑥 빠져 버린다거나 난간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다.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은 알지만 이런 구조물에 올라가 있는 바로 그 순간에는 이런 상상에 사로잡혀서 공포가 훅 끼쳐 온다.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그랬다. 한탄강에 경치를 보기 좋은 주상절리길이 있다는 사실과 3.6km 정도의 길이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발판 부분이 다 훤히 뚫려 있을 줄은 몰랐다. 길의 시작 부분은 바닥이 다 막혀 있는 나무 계단이어서 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무 계단 부분이 다 끝나고 철판으로 된 길이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머리는 멍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래 이 정도로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편은 아닌데, 오늘은 그다지 좋지 않은 컨디션과 예상치 못하게 마주친 상황 때문에 평소보다 더 심하게 무서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길의 특성상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난간을 잡고 가면 괜찮아." "아래를 보지 말고 멀리 풍경을 보면서 가." "철판이 나무보다 원래 더 안전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할 수 있어." 같은 가족들의 응원의 말을 들으며 겨우 겨우 한 발짝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중간쯤까지는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한 발짝을 더 떼어서 빨리 이 길을 벗어나야겠다는 목적뿐이었다.


내 나름대로 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해 보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떠올리며 이 강에 배가 띄워져 있다고 상상하기도 했고, <초한지>에서 파촉으로 쫓겨 들어가는 유방에게 장량이 잔도를 불태우라고 조언하던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속으로 외워 보기도 했다. 또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해서 일부러 시야가 눈에 잘 안 들어오도록 해 보기도 했다. 심호흡도 했고, 철이 얼마나 강한 물질인지를 생각해 내며 안심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노력들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가족들의 응원과 도움을 제외하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가장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그저 이 상황을 인식하고 계속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언젠가 이 길에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내가 그 끝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냥 앞으로 걸어가는 것. 그렇게 걷다 보니 아래가 휑한 이 잔도의 풍경과 조금씩 흔들거리고 출렁거리는 길의 감각이 익숙해졌다. 한번 익숙해지고 나자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여유롭게 풍경을 둘러볼 수 있었고, 주상절리에 감탄할 수 있었고, 맑아서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강물과 그 위를 오가는 오리들을 발견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다. 가족들과 웃고 떠들면서 남은 길을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처음 마주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예상치 못하게 마주하는 상황도 두려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끼는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이 공포를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벌벌 떨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어서 한 발짝을 옮기는 것 말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그 높이와 그 풍경과 그 공포에 적응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

2023년 3월 4일,

책상 앞에 앉아서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우리언니, 한탄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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