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일지04. 창업은 싸움의 연속

세상에서 갈등이 제일 싫은 사람도 해낼 수 있을까?

by 만들레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편하고 심플한 탐폰/생리대 파우치를 제작합니다.


원단 구하고 부자재 구하면 끝인 줄 알았어


이제 드디어 샘플을 통해 수많은 선택지들을 지워나간 끝에 생산 준비를 하게 됐다. 샘플용 원단의 스와치를 고를 때야 종합상가를 돌아다니면서 막 집어 오면 됐지만, 최종 결정된 스와치가 있던 상가로 가는 건 길치에게 첫 번째 거대한 난관이었다. 정말 미로임. 어찌어찌 동대문 종합시장 상가를 눈 돌아가게 뛰어다니며 색상별로 겉감, 안감, 지퍼, 고무줄, 스펀지 등 원하던 재료를 다 구했다. 게임에서 주인공이 퀘스트를 깨기 위해 모든 재료를 모으면 npc에게 “다 모아 왔어!”하면 만들어진다. 나도 그렇게 만들어질 줄로만 알았다.


가장 구하기 어려운 재료, 로고


파우치에서 로고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지만, 심플하고 단순하기에 디자인이랄께 로고뿐이라 신경 쓰고 싶었다. 이런 디자인의 영역은 언제나 전문가의 손길을 받아야 한다는 리스펙+ 빠른 제작을 위해 그냥 돈을 좀 내고 전문가에게 맡기자고 생각했다.


지금도 어떻게 했어야 맞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했던 퀄리티가 너무 아니었고, 수정을 요청했음에도 2차로 받은 게 기존 포폴과 너무 달랐다. 파우치 제작에 딜레이를 주기 싫어 빠르게 만들고자 로고를 돈 주며 맡긴 건데, 더는 시안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최종 시안을 받지 않을 테니 환불을 요구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어떻게 소통을 했던 게 맞는 걸까, 돈도 돈이지만 오며 가며 따지는 것이 참 힘들었다. 이런 작은 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에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냥 배운 돈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로고는 브랜드와 어울리는 느낌을 주는 영문 폰트를 찾아 빠르게 제작을 맡겼다.


작업지시서를 공장에 넘기면 끝일줄 알았지


로고 사태로 스트레스받고 딜레이 되는 동안, 구해진 스와치와 각종 재료를 작업지시서에 잘라 붙여 넣으며 cm단위로 서로 소통의 오차가 없게 더 신경 써서 만들었다. 일주일 넘게 기다린 로고 라벨도 오고, 드디어 이 사태가 마무리되는구나 신나게 공장에 뛰어갔다. 그동안 만들어왔던 샘플 중 가장 유사한 샘플과 작업지시서, 열심히 모은 재료들을 드리고 공장 앞 카페에서 우유를 마셨다.


굉장히 후련할 줄 알았는데 찜찜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꿈에선 각종 이상한 모양으로 제작된 파우치가 등장하며 스트레스받기도 했다. 공장 사장님이야 샘플을 만들며 몇 번씩이나 찾아뵈며 소통했으니까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작업지시서 종이? 그런 거 없는데

사장님이 완성품 사진을 보내오셨다. 작업지시서와 전혀 다른 위치에.. 내가 그 로고사태를 겪으며 힘들게 만든 라벨이 붙어있었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동안 소통도 많이 하고 생산용 재료 드릴 때 작업지시서를 분명히 드렸는데 없다고 하신다.


로고뿐만 아니라 그냥 모든 걸 작업지시서 없이 진행하신 거다. 원단도 1마씩 날아갔다. 이건 본인이 잘못 붙이신 거니 본인이 사겠다 하신다.


로고가 잘못 붙어있어도 파우치 기능엔 아무 쓸모없는 거 안다. 공장 사장님이 원단을 물어주신다는데, 그것도 된 거 아닌가. 근데 마음에 힘이 자꾸 빠진다.


내가 너무 순진하고 단순하게 달려들었나 싶다. 사회가 녹음과 서면과 계약들이 필수라지만 어느 정도 일에 있어서는 열심히 하고 충실히 하는 감각들은 있지 않나? 분명 내가 요청하고 받은 결과물들인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시켜야 한다

처음 파우치를 제작하겠다 다짐했을 때 부푼 마음은 작은 가시들로 바람이 빠진 지 오래지만 이젠 만드는 게 목표가 됐다. 내가 원하는 물건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게 이렇게나 하나하나 도전이고 싸움일지 몰랐지만, 마지막은 나와의 싸움이다. 지쳐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마음과 싸우며 만들어내야 한다.


파우치 하나 만들며 참 많은 걸 배운다.


누군가와의 갈등이 싫어 늘 회피하거나 손해를 보며 넘겼던 나에게 조금이라도 성장하라며 퀘스트를 던져주는 느낌이다. 꿀덕꿀덕 잘 받아먹고 성장해서 파우치 하나라도 남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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