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 착각은 자유 #1 계속
어렸을 때 열심히 Monday, Tuesday, Wednesday... 이렇게 요일을 순서대로 암기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one, two, three... 같은 숫자는 어떤가?
앞서 "당신은 영어를 두 배 더 힘들게 배우고 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색깔의 이름, 과일의 종류, 가족 구성원 처럼 같은 의미 집단에 들어가는 단어를 모아서 공부하는 것이 따로 공부하는 것보다 최대 2배까지 더 힘들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준 바 있다.
그렇다면 요일이나 숫자처럼 뜻이 연관되어 있기도 하지만 순서또한 정해져 있는 단어 무리는 모아서 순서대로 배우는 것이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또한 순서대로 배우지 않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처음 배우던 초보 시절로 돌아가보자. 당시 누군가가 목요일이 영어로 뭐지? 라고 물으면 Monday부터 시작해서 Tuesday, Wednesday… 등 요일 이름을 순서대로 다 나열하고 나서야 겨우 대답할 수 있었던 기억이 있지 않는가? 아마 목요일은 Thursday! 하고 바로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지나서였을 것이다.
요일을 순서대로 배우게 되면 각 단어의 의미보다는 요일 간의 순서가 더 강하게 연결되어 뇌에 저장된다. 때문에 순서대로 요일을 배운 사람이 특정 요일을 연상하려면 그 뜻보다는 순서가 먼저 떠오른다.이 경우 요일의 순서가 앞선 글에서 설명한 간섭 효과(Interference Effect)를 일으킨다. 문제는 일단 생긴 간섭 효과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의 뇌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순서보다 뜻이 더 강하게 연상될 때까지 머릿속에 요일의 순서가 떠오르는 것을 억제(Inhibition)해야 한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 단어를 배워서 기억에 저장하는 것 뿐 아니라 그 단어와 연관된 다른 모든 단어들의 연상을 억제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다 (Green, 1998; Kroll and Stewart, 1994). 그 이유는 어떤 단어를 말하려면 그 단어와 관련된 다른 모든 단어들도 어느 정도는 활성화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red를 이해하거나 말할때 blue, red, yellow처럼 같은 의미 집단에 속하는 단어, wreck 처럼 비슷한 발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reduce처럼 비슷한 철자로 시작하는 단어, 그리고 물론 모국어 한국어 단어인 '빨간색'같은 단어들도 어느 정도 활정화가 된다.
학자들은 우리의 뇌가 이런 관련되었지만 필요하지 않은 정보의 연상을 끊임없이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심지어 한국 사람들이 모국어인 '빨간색'을 말할 때조차 상황에 따라 외국어 단어인 red나 비슷한 발음의 다른 영어 단어가 연상되는 것 또한 억제해야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뇌의 억제 활동이 얼마나 활발하고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쓸데없이 떠오르는 관련 기억을 억제하는 능력을 전문적인 용어로 인지 통제력 (Cognitive Control)이라고 한다. 이 생각을 통제하는 능력은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하다.
만약 어떤 일을 하는 매 순간 연관되는 모든 기억이 동시에 떠오른다고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주차장에서 오늘 주차한 장소를 기억해 내려는 순간, 예전에 주차했던 장소들 모두가 동시에 떠오른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의 뇌는 필요한 정보를 선택하고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억제하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다 (Anderson, 2003; Bjork, 1989). 가장 최근에 주차한 장소만 떠오르고 다른 관련 없는 장소, 예를 들어 어제 주차한 장소에 대한 기억은 억제하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워 유창해진다는 것은 반복된 연습을 통해 불필요한 연상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는 것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끔 어떤 학생들을 보면 항상 자기 수준보다 훨씬 높은 내용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다.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룰 생각이지만 이것은 효과적이지 못한 언어 학습법이다. 이미 배웠고 아는 것도 자주 반복하여 단어의 연상과 억제를 "자동화"시킬 필요가 있다.
외국어뿐만 아니라 어떤 공부를 하든 지금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하고 있는 이것이 과연 내가 공부를 하는 목적에 부합한 것인가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일의 예를 다시 들자면 영어를 하면서 요일의 순서가 나에게 과연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때에 따라 이 순서를 연상해 내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니다. 따라서 요일의 순서는 영어 학습에 불필요한 내용이니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목요일이 Thursday라는 요일의 뜻만 알면 된다. 게다가 앞에서 말한 대로 순서가 뇌에 강하게 입력되면 더 중요한 정보인 뜻을 연상하는 데 방해가 된다. 즉, 요일의 순서를 배우는 것은 억제해야 할 내용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므로 쓸데없이 학습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효과적인 영어 학습 방법을 찾고 있는가? 그러면 간섭현상을 줄이고 불필요한 노력이 들어갈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잘 아는 것 역시 정말 중요하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영어 교과서와 문제집의 빼곡한 필기를 기억하는가? 지문의 아래 빈 공간에 모르는 단어의 뜻을 빼곡하게 적어 놓고, 온갖 동의어와 반의어까지 빼곡히 적어둔 기억이 다들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아마 영어를 처음 배울 때 Left와 Right을 한참 헷갈려 본 기억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어 공부를 불필요하게 어렵게 했다. 비효율적으로 했다. 최대 2배 어렵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학창 시절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영어 공부에 투자했지만 모든 시간이 효율적인 학습에 쓰인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들여 더 어렵게 공부한 것이 많다. 과학적인 노트 필기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한번 다룰 생각이지만 일단 Left와 Right처럼 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나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를 처음부터 다 같이 모아서 공부하는 것 또한 비효율적인 공부 방식이다.
물론 유의어나 반의어를 비교하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간섭 효과는 새로운 단어를 배울 때 특히 많이 나타난다. 즉, 관련된 단어 둘 다 잘 모르는 단어일 때 간섭 효과가 크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단어를 이미 잘 알고 있는 경우에는 동의어나 반의어 같은 종류의 단어를 모아서 비교하는 것도 좋다. un-, dis-같은 단어를 구성하는 구성요소의 뜻을 배워 적용하는 것도 중급 이상에서는 도움이 된다.
그렇다. 많은 단어를 종류별로 모아서 가르치는 한가지 이유는 그것이 각 단원에서 가르칠 내용을 정하는 편리한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배울지 결정할 때 빨간색을 배우면 자동적으로 파란색은 뭐지? 하고 알고 싶어 지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어떤 순서로 공부할 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
당신이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토요일에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이때 “Saturday (토요일)”을 배우면 된다. 약속을 하는 데 필요한 토요일만 배우지 토요일을 배웠다고 해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모든 요일을 다 배우지 말 것이다. 그리고 lunch (점심)을 배웠다고 해서 아침과 저녁을 배울 필요도 없다. 당신이 필요할 때 그 상황에서 필요한 단어를 배우면 된다. 다른 요일이나 다른 식사 시간은 다음에 또 필요할 때, 그때 배우면 된다.
배우는 순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이 여동생만 하나 있다면 sister를 먼저 배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아마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높으니. 남자 형제가 없는데 brother에 대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은 낮지 않은가? 가장 필요하고 나와 관련된 것을 먼저 배우는 것, 이것이 더 효과적이다.
숫자의 예를 들어보자. 태국 출장을 앞두고 몇 주간 태국어를 잠시 배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철저히 “필요한 것만 배운다.” 라는 기준에 근거해서 태국어를 공부했다. 제일 처음 배운 숫자는 2였다. 왜냐면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 데 나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숫자는 4 와 1이었다. 당시 내가 지도했던 태국어 교사들과 태국 식당에 갔는데 넷이서 갔기 때문에 우리는 네(4) 명이라고 말해야 했다. 미국에서 식당에 가면 먼저 일행이 몇 명인지 말을 하고 앉을 자리를 안내 받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서 팟타이 하나(1) 라고 말해야 했다. 그래서 그때 4와 1이라는 숫자를 배웠다. 바로 다음 배운 숫자는 6이었다. 그때 내 사무실 호수가 4626이었는데, 그때 4와 2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6만 더 배운 셈이다. 그 후에는 1309를 배웠다. 이것은 태국에서 머문 호텔의 방 호수였다. 호텔 프런트 직원에게서 3, 0, 9를 배운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당시 내 전화번호를 말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이쯤 되자 나는 대부분의 숫자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배운 숫자가 훨씬 더 쉽게 기억되고 필요하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태국어를 그때만 잠시 쓰고 거의 다 잊어버린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 배운 대부분의 태국어를 다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숫자 2는 생생히 기억난다. 왜냐면 내겐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이 “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쉽게 배워지고 잘 잊혀 지지도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한 두 시간 정도 투자해서 약 2주간 배운 태국어로 나는 시장이나 식당에서 함께 간 동료의 간단한 태국어 통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재래 시장에서 처음 가격을 흥정했던 때를 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서툰 태국어였지만 효과적으로 흥정에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가격을 많이 깎을 수 있었다. 그동안 아주 짧은 시간을 투자하여 배운 태국어가 실제 상황에서 필요할 때 바로 쓰이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고 뿌듯했고, “필요할 때 배운다.”는 원칙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아뿔싸. 실컷 흥정을 끝내고 막상 돈을 지불하려고 보니 상인이 배가 부른 임산부인게 아닌가. 힘들게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임산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결국 제 값을 다 주고 물건을 샀다. 게다가 나중에는 다른 물건들을 한참 더 얹어서 그 모든 물건을 부르는 값을 다 주고서 나왔으니 결국 배운 태국어를 정작 필요할 때는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도. 하지만 그 가게를 나오는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그때 가슴을 가득 채웠던 뿌듯하고 사랑 넘치는 마음은 돈이나 태국어 실력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을 테다.
“좋아요. 하지만 그때 선생님은 태국에 여행을 간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잖아요. 저는 그런 게 없는데 어떻게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죠?”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필요할 때 배운다”는 원칙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때 그때 상황에서 관심이 가는 내용, 그리고 자기 생활에 더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공부하면 된다. 그렇지 않은 내용은 그냥 넘기면 된다. 그리고 그 시간에 다른 새롭고 관심있는 내용을 공부해라. 언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이든 반복된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금요일'을 배우지 않아도 언젠가는 '금요일'을 배울 기회가 반드시 돌아온다. 지금 금요일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면 지금이 금요일을 배울 때다. 필요할 때 하나씩, 목요일, 월요일, 금요일 … 이렇게 하나씩 배우다가 꽤 많이 배웠다 싶으면 그때 확장해서 전부 배우면 된다.
내게 중요한 것, 관심 가는 것, 꼭 필요한 것을 배워라. 그런 다음에 확장하라. 이것이 영어를 두배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참고 문헌
Anderson, Michael. (2003). Rethinking interference theory: Executive control and the mechanisms of forgetting. Journal of Memory and Language. 49. 415-445.
Bjork, R. A. (1989). Retrieval inhibition as an adaptive mechanism in human memory. In H. L. Roediger III & F. I. M. Craik (Eds.), Varieties of memory and consciousness: Essays in honour of Endel Tulving (p. 309–330). Lawrence Erlbaum Associates, Inc.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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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영어 공부에 관한 글은 블로그에 쓰겠습니다. 브런치에는 에세이만 올립니다. 전혀 다른 주제와 성격의 글이라 각각 다른 곳에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입니다. 영어 공부에 관한 글을 계속 읽고 싶으시면 제 블로그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그동안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합니다. 항상 평안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