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영어를 두 배 더 힘들게 배우고 있다

영어 공부 착각은 자유 #1

by 제주 늘보

뭐라고? Red와 Blue를 같이 배우지 마라고?


그렇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영어 단어를 배울 때 비슷한 종류의 단어, 예를 들어 빨간색과 파란색은 따로 배우는 것이 좋다.


오늘은 처음으로 “빨간 사과”라는 표현을 배우고 며칠 후에 “파란 하늘”을 배우는 식으로 말이다. 방금 red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다고 해서 옳다구나, 빨간색이 나왔으니 파란색도 같이 배워야지 해서 나머지 다른 색깔들도 다 모아서 파란색은 blue, 노란색은 yellow, 초록색은 green, 이런 식으로 모두 모아서 함께 배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이다.


Colors - crayolas.jpg 색깔의 이름끼리 모아서 공부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공부를 최대 2배까지 어렵게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연관된 단어끼리 같이 배우는 게 좋지 않다니. 공통점이 있는 것끼리 모아서 배우는 게 당연히 훨씬 좋지 않아?”


보통 이런 반응이다. 평생 그렇게 공부해 왔으니 이해할만한 반응이다. 사실 지난 수년간 외국어 교사 교육을 하면서 이 말이 나오면 대부분 의심부터 했다. 처음부터 이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교사 교육을 하면서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이 교사들이 이미 갖고 있는 믿음에 반하는 내용을 소개하거나 도입하여 새로운 시도를 할 때이다. 경험치가 풍부한 교사나 학생들은 보통 풍부한 경험에서 얻어진 직관적인 믿음이 있다. 그리고 현장에서 일해보면 과학적 연구 결과보다 교실에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본 선생님들이나 공부를 직접 해본 학생들의 직관적인 앎이 훨씬 더 유용할 때가 많다. 하지만 무조건 경험에 근거한 믿음만을 고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람이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그 경험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관찰하는 학문이 생기는 것이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내 말만 듣고는 반신반의하지 싶다. 하지만 일단 끝까지 연구 결과를 들어 보고 마음을 정하길 바란다.



궁금하다고? Semantic Set (의미 세트)에 대한 연구


뜻이 연관된 단어를 모아둔 것을 Semantic Set (의미 세트)라고 한다. 예를 들어 색깔의 종류, 과일의 종류, 동물의 이름, 가구의 종류... 등등처럼 어떤 뜻의 기준을 두고 그 기준을 만족시킨 카테고리 안의 단어들을 모은 것을 말한다.


Fruit stand.jpg Semantic Set (의미 세트)의 예


학자들은 새 단어를 배울 때 Semantic Set (의미 세트)로 모아서 배우는 것이 Unrrelated Set (관련성 없는 세트)로 배우는 것에 비해 훨씬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e.g., Higa, 1963; Tinkham, 1997; Waring, 1997). 한마디로 빨간색과 파란색을 같이 배우는 게 따로 배우는 것보다 어렵고, 그 학습 효과도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연구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학생들에게 처음 보는 외국어를 배우게 하는데 두 집단에게 각각 다른 단어 리스트를 주었다. 한 집단에는 관련된 단어 목록을 (사과, 배, 복숭아), 다른 집단에는 연관성 없는 단어들을 (하늘, 신발, 쥐) 말이다. 그리고 주어진 목록의 단어들의 뜻을 암기하도록 시켰다.


그 결과 하늘, 신발, 쥐처럼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어 목록을 공부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이 밝혀졌다. 똑같은 시간 동안 공부를 한 후에 테스트를 한 결과 관련 없는 단어 목록을 공부한 학생들이 관련된 목록을 공부한 학생들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를 기억했다.


학습 시간으로 따지자면 의미 세트 목록을 공부하면 그렇지 않을 때 보다 50%에서 100%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말은 연관된 단어를 같이 배우면 같은 양의 학습 성과를 올리기 위해 최대 두 배까지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차이는 장기적인 것이어서 학습 후 며칠이 지나서 실시한 장기기억 시험에서도,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 단어를 다시 공부한 후 실시한 재학습 실험에서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Screen Shot 2020-10-20 at 8.56.15 PM.png 같은 종류의 단어들을 모아서 공부하지 마라.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간섭 효과의 비밀


간섭 효과 (interference effect)때문이다 (Nation, 2000). 1950년을 전후로 심리학자들은 망각을 일으키는 요소에 대한 연구들을 활발히 했다. 그중 하나가 학습하는 내용에 비슷한 요소들이 있으면 그 비슷한 점이 서로 간섭을 일으켜서 배운 것을 더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즉, 색깔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같이 배우게 되면 빨강이라는 단어를 연상할 때 파랑이라는 연관된 단어가 간섭 효과를 일으켜서 각 단어의 의미를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두 단어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망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빨강 파랑 노랑 등 색깔뿐 아니라 과일의 종류 (사과, 수박, 복숭아 등)나 신체부위 (머리, 어깨, 무릎 등) 같이 단어를 의미적 공통점이 있는 종류에 따라 무리 지어 배우면 간섭 효과가 나타난다. 때문에 최대 두배나 더 많은 노력이 들어야 각 단어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다.


같은 의미 세트의 단어를 연관 지어 배우는 게 어느 상황에서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좋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만약 이미 빨간색을 배워서 잘 기억하고 있고 언제든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익혔다면 그때는 파란색을 같이 연관 지어 배우는 것도 괜찮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에 연결해서 배우는 것은 단어 간의 연관성을 이용하여 단어의 뜻을 더 풍부하고 쉽게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빨간색도 제대로 기억을 못 하면서 파란색, 노란색... 이런 식으로 모든 새 단어를 동시에 같이 배우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하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이 온통 헷갈리게 되고 우리의 두뇌는 이들을 구분하는 데 쓸데없이 에너지를 쓰게 된다.



이럴 수가! 그동안 나는 속았다?


Surprise.png 알고 보면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마 놀랐을 테다. 서점에 가서 영어 교재를 보면 대부분이 단어를 공통 카테고리별로 모아서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 교재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과연 왜 그런 걸까?


그건 아마 습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막연한 추측에 근거한 직관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다. 사람들은 정보를 비교하고 정리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하면서 학습을 하면 더 적은 노력으로 배울 수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어떤 저자들은 이렇게 단어를 종류별로 모아서 가르칠 것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단어를 모아서 가르면 더 쉽게 관련된 단어를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고, 각 단어를 머릿속에 종류별로 정리해서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그냥 직관적인 주장이며 실제 연구 결과로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끔 기존의 외국어 학습 교재나 교육 과정을 보면 가끔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가던 쥐들의 행렬이 떠오를 때가 있다. 맨 앞 줄에 있는 쥐들이야 소년의 피리 소리에 홀려서 따라갔겠지만 아마 열의 맨 뒤쪽에 있는 쥐들은 그저 생각 없이 앞선 쥐들을 열심히 따라가다가 죽음을 맞이 한 게 아니었을까?


물론 반드시 빨간색과 파란색을 따로 배워야만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다 그렇게 공부했지만 결국엔 영어를 이만큼은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런 작은 차이들이 모이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상당히 갉아먹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알고 보면 놀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당신은 지금 영어를 두 배 더 힘들게 배우고 있을 수도 있다.



참고 문헌

Higa, M. (1963). Interference effects of intralist word relationships in verbal learning. Journal of Verbal Learning and Verbal Behavior, 2, 170-175.

Nation, I.S.P. (2000) Learning vocabulary in lexical sets: dangers and guidelines. TESOL Journal 9, 2: 6-10.

Tinkham, T. (1997). The effects of semantic and thematic clustering on the learning of second language vocabulary. Second Language Research, 13(2), 138-163.

Waring, R. (1997). The negative effects of learning words in semantic sets: a replication. System, 25(2), 261-274.


사진 출처

Creative Commons

Shuttorstock.com



안내 드리는 말씀

앞으로 영어 공부에 관한 글은 블로그에 쓰겠습니다. 브런치에는 에세이만 올립니다. 전혀 다른 주제와 성격의 글이라 각각 다른 곳에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입니다. 영어 공부에 관한 글을 계속 읽고 싶으시면 제 블로그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그동안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합니다. 항상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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