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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Nov 20. 2020

어쩌다 내가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변화무쌍한 제주의 날씨가 실감 나는 아침이다. 아침에 열어둔 창문으로 때 아니게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더니 갑자기 방안으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잠시 후 비가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커피숍을 향한 택시 안에서 남편이 유난히 선명한 무지개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토록 특별한 무지개도 제주의 변덕스러운 날씨에는 속수무책이다. 결국 택시가 채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퍼붓기 시작하는 비를 뚫고 빗방울이 마구 튕기는 길을 건너 단골 커피숍에 도착했다. 제주의 날씨는 중년의 흔들거리는 마음 같다. 사춘기 아이의 널뛰는 기분 같다.


비 오는 날에는 커피숍이 한결 더 운치 있다. 빗방울이 또로록 또로록 내려치는 창문 너머 바다 풍경이 아련하다. 파도는 아마 비 맞기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젖은 발의 느낌을 좋아라 하지 않는 나는 뽀송뽀송 마른 발로 폭신한 의자에 앉아 비 내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지금 이 순간이 진하게 행복하다. 비바람 치는 바깥 풍경은 쾌적한 커피숍의 안락함을 한결 더 진하게 느끼게 해 준다.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마끼아또에 생설탕 한 스푼을 털어 넣고 평소보다 더 천천히 숟가락을 젓는 데 편안한 안도감 비슷한 것이 올라왔다. 행복감과 감사함이 한 스푼씩 더해진 커피에서 나는 향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구수하고 진하게 느껴졌다.  


문득 어쩌다 내가 이 커피숍에 앉아 있게 되었나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내가 흘러 흘러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행복하고 감사한 커피 향기를 맡으며 뽀송뽀송 마른 발의 편안한 안도감을 만끽하게 된 걸까. 순간 익숙한 커피숍이 갑자기 새롭고 낯설게 느껴졌다. 잠시 커피를 젓던 숟가락을 멈추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충만한 감사함을 만끽했다.


이 순간 이 장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우연이라 할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하나하나의 각 사건을 맞이할 때 나는 당연히, 의심할 바 없이 우연한 사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어난 일들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길을 걸어가고 있는 때는 모르지만 지나간 후 온 길을 되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의 흐름이 보일 때가 있지 않는가. 지나고 보면 하필 왜 그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지 신기하게 생각되는 때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연달아 일어나면 어느 순간 우연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살면서 한 번쯤은 다들 있지 않을까.


제주는 그렇게 우리를 불렀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내 마음이 제주를 품자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그 길을 터주었다. 우연히 계획한 3주간의 한국 여행 계획이 완벽한 타이밍에 5개월로 연장될 기회가 생겼다. 남편의 사업이 잠시 휴지기에 들어갔고 나의 회사에선 맡았던 중요한 프로젝트가 일단락되었고 나머지 일을 바로 이어받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새 동료가 나타났다. 나를 무조건 믿고 지지해 주던 은인 같은 상사에게 덜 미안한 마음으로 휴직을 허락받았다.


때마침 모기지가 아주 많이 남아 있던 살고 있던 큰 집이 내놓자마다 하루 만에 팔렸다. 팔 생각도 없었던 나머지 집들을 사겠다는 사람이 그것도 두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세금을 정리해 주던 우리의 회계사는 대학원 시절부터 갖고 있던 작은 콘도를 사겠다고 나섰다. 내 차를 사겠다는 사람마저 갑자기 나타났다. 단 5개월 휴직을 하면서 집도 팔고 차도 팔고 가진 것을 다 파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궁금해 했지만 나는 그저 우연인 듯 보이는 삶의 사건들에 이끌리듯 순응했을 뿐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때문에 휴직 연장을 허가받고, 코로나가 발발하고, 우연히 받은 건강검진에서 남편의 암이 발견되면서 휴직이 한번 더 연장되고... 하는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그저 삶이 주는 무수한 우연인 듯한 사건들에 순응했을 뿐이었다. 처음 한국에서 코로나가 발발했을 때처럼 주변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클 때도 우리는 그저 삶이 이끄는 대로 순응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계획이라 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물으면 납득하도록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끌림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남들에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나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서 추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나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 조차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따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알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추구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런 내가 분명하게 아는   가지가 있다면 지금  순간, 나의 뽀송뽀송한 발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좋다는 것이다. 지금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안도감과 행복함이 감사하다는 것이다.  주변의 공기를 부드럽게 채우는 고소한 커피 향기가 좋다는 것이다. 지금  옆에서 음악을 듣는 중인지 흔들 흔들 들리는 남편의 실루엣이 모니터를 보고 있는   옆으로 살짝 비치는 것이 눈물 나게 감사하다는 것이다.


어쩌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커피숍에,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는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삶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하나 모여 나를 여기로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이제껏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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